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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May 04. 2023

일상적 글쓰기의 어려움

결국 수필이나 에세이는 여유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_수필/피천득/범우사


오랜만에 피천득 수필집을 들여다봤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로 시작하는 오래전 교과서에서 본 그 글이다. 쓰는 이의 생활과 생각을 담는 편안한 글이면서 '거슬리지 않는 파격'을 더할 수도 있다는 그런 내용인데 오늘은 다 제쳐두고 한 단어만 눈에 들어왔다. 


여유.

그동안 쓰려다 그만두고 쓰다 멈추고 쓰지 않던 날을 지내며 내내 우울했던 이유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의식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늘 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지, 왜 쓰지 않는지, 언제 쓸지, 나는 왜 쓰는지. 질문이나 생각거리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결국 쓰기를 생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늘 생각하면서도 매일 쓰지 못하고 종종 쓰게 된다. 전에는 '매일 씁니다'라고 썼는데 언제부터인가 쓰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종종 쓴다'라고 바꾸고 말았던 일에 은근히 마음 상하는 날도 있다. 얼마 전까지는 새벽 시간도 육아 시간 연장이라 그랬다는 변명이라도 댔는데 이제는 그 변명도 궁색해지고 말았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절박함과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과 조금이나마 덜어진 육아 부담과 조만간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에 대한 생각이 오늘 이 글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서, 이제 시작한다고 선언하고서, 잘 안 된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하루하루 미루게 되는 일들이 있다. 직접 겪었거나 들은 일로 독서, 운동, 글쓰기, 다이어트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꼭 해야 하는 건 아닌, 덜 간절한 일들이 꼭 그렇다. 

 사실 내가 경험한 글쓰기는 결심하고 시작한 무언가라기보다 머리와 마음에 생각이 가득 차서 어딘가에 풀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날들이 만든 습관에 가깝다. 결심하지 않고 습관처럼 조금씩 계속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쓰는 데 여유가 생겨서 더 나은 단어, 표현, 문장, 뉘앙스를 고민할 수 있던 거다. 물론 그날들에는 지금처럼 누군가를 돌보는 데 거의 모든 여력을 소모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습관이다. 좋은 때가 적당한 노력과 맞물려 어렵다는 느낌보다 즐거움이 컸던 거다. 글쓰기보다 먼저 생활화한 독서도 큰 도움이 됐다. 즐거웠기에 부담 없었고 부담 없었기에 편안했고 편안했기에 계속할 수 있었으며 계속하게 되니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이상향은 그런 여유로움이 만드는 세계였던 거다. 


 여유가 있기에 왜 쓰는가를 고민한 날은 많지만 어떻게 쓰게 됐나를 생각하는 날은 적었다. 깊이 들이쉬고 길게 내뱉는 두 번의 호흡만큼의 여유가 마음속 세상을 평화롭게 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여유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니 이제 좀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다. 분명 숨을 쉬고 있었을 텐데 숨을 쉰 기억이 없다. 시간이 없는 건 아닌데 글을 쓸 시간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글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지나간다. 여전히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매일 벌어지지만 이제는 제법 느긋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걸 보면 나이가 들어가도 마음은 자라는 모양이다. 오래 별러왔던 아이와의 시간, 일상을 조금 더 꾸준히 써볼 마음도 먹었다. 소재와 일화를 모으고 글에 붙일 제목도 궁리 중이다. 


 근래 날씨가 그렇게 좋더니 어린이날 연휴 내내 비가 온단다. 비 오기 전에 아이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 혼과 함께 여유를 쏙 빼갔던 아이, 이제는 쑥 자라서 여유에 더해 웃음과 기쁨까지 돌려주는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잠시 시간을 내서 적는다.


동네 카페 휴무일에 왜 문을 닫았느냐며 두드리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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