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시의 쓸쓸
나는 고양이들에게 유감이 없다.
특별히 애틋하게 느끼는 유감도 섭섭한 마음의 유감도 없었다는 의미다. 고양이를 보는 마음이란 소소한 연민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불쾌함이었다. 어느 도시에 살든 나와 고양이들은 늘 충분히 떨어져 있어서 가까워지거나 다투는 일 없이 무던했다. 도시에서 우리는 사물처럼 스쳐 지나며 모른 척 살았다. 그런 관계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건 소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다. 책방 근처에 있는 공원을 터전 삼아 사는 고양이들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기르지 않는 동물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길 위의 생명을 생각하는 숭고한 마음보다 변덕스러움으로 사료나 간식을 베풀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베풂, 그것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하나의 놀이였다.
책방을 열고 얼마 후 주민의 민원이 들어왔는지 공원에 고양이 먹이를 주지 말라는 안내가 붙었다. 주민 몇이 뜻을 모아 공모사업으로 준비한 고양이 집도 철거됐다. 볕 좋은 날이면 한가롭게 뒤엉켜 누워있는 고양이 모습도 점점 보기 어려워졌다. 처음 여행 왔을 때 이 도시가 살기 좋고 평화로우며 사람들의 심성이 순하다고 느끼게 했던 풍경 하나를 그렇게 잃어버린 것이다. 그 무렵부터 책방 앞에 그릇을 두고 고양이 밥을 주기 시작했다. 서열이 가장 높아 보이는 두 모녀와 세력이 가장 큰 네 자매, 홀로 다니지만 두루 친한 한 마리와 아직 중성화가 안 된 한 마리가 매일 찾아왔다. 드물게 고양이 식당을 찾는 두 마리까지 열 마리는 모두 고양이 공원에 살던 녀석들이었다.
책방 앞에 고양이 식당을 차린 지 한 달이 넘어갈 무렵 찾아오는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서열이 가장 높은 모녀 고양이의 엄마는 '아야', 딸은 '다정이'로 지었다. 아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많이 아파 보였다. 심한 구내염 때문인지 마른 몸에 털빛도 좋지 않았다. 같이 다니는 고양이가 딸이라는 걸 알려준 건 주민 중 한 분이었다. 전혀 닮지 않아서 상상도 못 했는데 관계를 듣고 보니 다른 고양이들에게는 쌀쌀맞고 사나운 녀석이 엄마에게는 유독 다정해서 다정이가 됐다. 세력이 가장 큰 네 자매는 그 인상이 닮은 데다 늘 함께 다녀서 가족인 줄 알았다. 처음 봤을 때 막 꼬리가 잘린 맏이와 진중한 둘째 까불이 셋째와 까칠이 넷째를 차례로 '담미', '메롱이', '치즈', '사만다'라고 불렀다. 꼬리가 잘린 모습을 보고 단미라고 하려다 그 이름이 슬퍼서 꼬리가 담박하다는 의미로 담미라고 지었다. 메롱이는 입을 다물어도 늘 혀로 메롱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었고, 치즈는 흔한 치즈 색깔 고양이라서 사만다는 털 빛이 미간에 눈이 하나 더 있는 듯 보여서 삼안다, 사만다라고 했다. 혼자 다니는 붙임성 좋은 녀석은 책방을 만들 때 자주 안쪽까지 들어와서 탐색하는 모습을 봤기에 궁금한 게 많다는 의미에서 '궁금이', 중성화가 안 된 녀석은 그 활발한 야성과 큰 풍채를 따서 '사자'라고 했다. 책방을 열기 전부터 이 동네에 살던 고양이들이기에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지은 이름을 찾아오는 손님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이름을 지어준 여덟 중 둘은 4년 반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은 여섯은 여전히 매일 혹은 드물게 책방 앞 고양이 식당을 다녀간다.
나는 다만 꾸준히 사료와 물을 제공할 뿐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더 아파 보이는 고양이를 구조해 병원에 보내거나 입양할 사람을 찾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행동도 줄 수 있다고 믿는 도움도 아니었다. 고양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확신이 없었고 더 많은 걸 하려고 마음먹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조차 조만간 그만두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책방을 할 거냐는 물음에 '되도록 오래 하고 싶다'며 냉정하게 들으면 모호한 대답을 하곤 했는데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고 고양이들이 밥을 먹으러 오는 한 되도록 꾸준히 하고 싶었다. 더 많이가 아니라 책방 앞 식당을 찾는 고양이들에게 되도록 오래, 계속.
책방 앞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을 두고 모두가 좋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중성화가 끝난 고양이를 보면서 배가 불렀다며 '새끼를 밴 게 분명하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얘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고양이들이 시끄럽게 굴며 집 마당에 똥을 싸거나 음식을 훔쳐간다며 (내가 사료를 주기 때문에 그 고양이들이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은근한 책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내가 없는 곳에서도 책방 앞에 고양이 밥을 주는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다. 2019년 9월에 쓴 '왜 문 앞에서 고양이를 키워?'라며 고개를 돌렸다는 글에 등장하는 그분이다. 다시 떠올려봐도 그분의 그때 표정은 불만이나 화남이라기보다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장사를 하는 집 앞에 고양이가 오가는 모양, 밥그릇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사료며 흘린 물을 보며 '이렇게 해서 먹고살기는 하겠어?' 하는 염려가 묻어있던 것이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그리고 맥락도 없이 오늘 문득 그때 그 말을 했던 그분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 원도심에 사는 어른들 대부분은 평생이거나 반평생 넘는 시간을 여기서 보냈다. 작은 도시라 오가며 만나던 어른들을 원도심에서 볼 수 없게 되는 이유는 주택보다 편한 아파트로 이사하거나 요양 시설로 이송되거나 돌아가시거나 중 하나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기에 문득 그때 그분이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는지, 어디로 가버린 건지 마음이 쓰였다.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하면서도 쓸쓸해졌는데 부쩍 차가워진 가을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모든 소도시의 삶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작기에 더 자주 보고, 더 많이 알게 된다. 가까워지는 만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의 일부로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 일부가 사라졌음을 깨달으면서 이유 모를 허전함과 쓸쓸함과 마주치기도 한다. 그 모두가 소도시의 삶에서는 드물지 않은 순간이기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2년 6개월이라고 한다. 5년 전쯤 접한 통계라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아마 비슷할 것이다. 책방 앞 식당을 찾는 고양이 중 여섯은 4년 6개월째 보고 있다. 그때 이미 다 자란 상태였으니 아마 나이는 다섯 살이 넘었을 것이다. 이들은 평균의 두 배 넘는 시간을 살아낸 것이다. 이 고양이들이 오래 살수록 다른 어딘가의 고양이들의 수명이 짧아지게 될까? 아니면 그나마 이들이 있어 그 정도 수치의 평균 수명이 나오게 된 걸까.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일정 구역에 일정 개체 수가 유지된다고 한다. 가끔 처음 보는 고양이가 생겨났다가 얼마 후에는 보이지 않게 되는 일이 지난 4년 간 반복되었으니 텃세를 이길 만큼 힘이 세지 않은 한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건 명확하다. 그럼 쫓겨난, 떠나야 했던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람 사는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듯 길고양이가 사는 세상도 다를 것 없을 텐데 말이다.
소도시나 시골로 이주한 사람들의 평균 거주 기간은 얼마나 될까. 어느 도시에나 텃세라고 부를만한 낯선 면모가 있어서 알아가며 적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다르다며 실망할 것이다. 실망이 크면 떠나는 사람도 있겠고 만족이 커서 친구나 가족 혹은 지인을 초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도시의 책방은 길고양이를 위해 문 앞에 놓아둔 사료 그릇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왜 문 앞에서 고양이를 키워?'라며 걱정과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겠지만 누군가는 그 작고 무심한 손길에 도움을 얻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화해를 돕지는 않아도 조금은 따뜻했다고 기억할 수 있는 온기를 남기는 공간. 책방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 온기를 품고 기다릴 수 있도록 오늘도 작은 애씀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