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책방을 찾아온 새로운 길냥이들
가가책방 앞 고양이식당에 새 손님이 왔다.
책방을 정리하려고 오는 길에 만난 담미(담미는 꼬리가 잘린 치즈 냥이의 이름이다)를 불러다 빈 사료그릇을 채워주고 들어갔다가 나와보니 먹고 있는 고양이가 담미가 아니다. 이건 누굴까 하고 들여다보려고 한 단 아래로 내려서는데 뒤에서 기척이 난다. 돌아보니 하얀 몸통에 뒷다리 부근 털만 노란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다.
"둘이 왔구나."
어디서 오는지 이방의 고양이는 오늘처럼 불쑥 나타난다. 사람으로 보면 이방인이고 대부분은 며칠 후에는 보이지 않는 게 보통이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만나고 이별하는 날이 비주기적으로 이어진다. 나는 마치 잠시 지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들르는 빈집의 처마처럼 찾아든 이들을 가리거나 내치지 않는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에게 모든 걸 맡긴다. 허락하거나 거부하거나 겁주거나 내쫓거나 내버려 둔다.
이 구역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담미가 둘에게 밥그릇을 양보한 걸로 봐서 어쩌면 이번에 나타난 둘은 조금 오래 머물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장이 허락한다 해도 다른 녀석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둘은 더 가까운 날에 이 구역을 떠나겠지만. 여기를 나서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자기들의 자리를 찾아 가깝거나 먼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책방을 열고 4년 넘는 시간 동안 주변에서 새끼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기이하다면 기이하게도 고양이 공원을 포함한 책방 주변 구역에서는 새끼를 낳은 고양이가 없거나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기억을 되짚어봐도 책방 앞을 찾는 낯선 고양이도 늘 다 자란 녀석들이었다. 대부분이 중성화 수술을 마친 상태로 나타난다. 드물게 중성화되지 않은 고양이가 보이기도 하지만 곧 자취를 감춘다. 전에는 주변 구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양이들의 텃세 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중성화를 거치지 않은 고양이 특유의 야생성과 투쟁 본능을 생각하면 그들이 떠나는 결정적인 이유는 번식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게 아닐까?
가가책방을 찾아오는 고양이들의 목적이 번식에 있지 않다면 그들은 생존과 생활을 위해 이곳을 찾았으리라. 문득 여행으로 처음 찾아왔던 공주로 돌아와 살기 시작한 내 모습과 새로 찾아온 고양이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말끔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고양이는 거의 없다. 얼굴과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 정리되지 않은 탁한 빛깔의 털은 부족한 영양 상태를 보이고 쉴 곳은 물론 몸단장에 들일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눈물자국은 흔하고 수술의 후유증인지 사람에게 강한 경계심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작은 소리, 조그만 움직임에도 깜짝 놀라고 언제든 물러설 준비를 하듯 몸을 긴장시킨다. 상처 입은 영혼, 휴식을 바라는 마음. 사람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책방 영역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의 허락을 얻고, 안정적인 먹이 공급처를 확보했다고 해서 이방 고양이의 자리 잡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달려오는 차를 피하는 법을 익히는 데 한참 걸릴 것이고 안전한 사람과 경계해야 하는 사람도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처럼 부쩍 추워진 날의 찬바람과 눈이나 비를 피할 보금자리를 찾는 일도 간단하지 않다. 이방 고양이가 우리들의 영역에 들어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의미다. 그날까지 나는 나의 일을, 고양이는 고양이의 일을 해내야 한다. 추운 날에도 비어있지 않은 밥그릇과 얼어붙지 않은 물을 줄 테니 계속 찾아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될 수 있다. 둘이 함께 왔으니 힘을 합치는 것도 좋은 길이겠다 싶지만 이건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 마음을 비운다.
"왜 문 앞에서 고양이를 키워."
낯선 고양이가 찾아올 때면 그 말과, 그날의 장면이 자꾸 다시 떠오른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왔을까. 조금은 냉소적인 마음으로 지레짐작했을까, 영역을 침범한 고양이를 경계하듯 공격적이었을까, 가능한 작은 자리를 가만히 내어주었을까. 이방인으로 찾았던 이 동네에서 어느새 '여기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흔하게 듣고 있다. 얼마쯤 우리들이 된 기분.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 고양이들이지만 마음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너희 둘.
친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남남처럼, 드물게 자주, 오래 보자.
이름으로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쌓이기를.
낙엽은 바람에 날려도 한 살 나이테를 늘리는 나무처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단단히 자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