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할 때는 천천히 심호흡하는 게 도움이 된다
오래 전 어느 날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는데 이상한 가사가 나왔다.
"숨을 너무 많이 쉬는 증상에 죽지는 않는다는 얘길 너에게 들었어."라는 가을 방학이라는 가수의 노랫말. 가사는 "죽을 것만 같은데 죽지는 않는다는 얘긴 너무 무서웠어"로 이어진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의 끝까지 되짚어봐도 숨을 너무 많이 쉬었던 경험이 없어서 노랫말 속 화자의 무서움에 공감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면 숨 쉬는 게 너무 당연하고 숨이란 우리를 살게 하는 활동인데 숨을 너무 많이 쉬면 죽게 된다니? 내겐 너무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산소중독이라는 공기 중에 산소 농도가 너무 짙어지면 생기는 증상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얕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흔히 하듯 산소가 희박한 것만큼 위험하다는 산소 중독과 너무 많은 숨 쉬는 증상이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하지만 찾아보니 증상이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숨을 너무 많이 쉰다는 의미의, 과호흡 증후군이라는 이름의 증상이 세상에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하거나 상상하지 못한 괴로움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는 것. 정의된 정상이 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그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는 의미였다. 뜬구름 같던 노랫말이 현실이 되면서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과호흡 증후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 당연하겠지만 나처럼 상상도 못 하는 사람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적는다. 과호흡 증후군이란 '어떤 이유로든 숨을 많이 쉬어서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배출하는 증상'으로 정의한다. 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어지럼증, 마비, 실신 같은 증상을 일으킨다. 호흡이 어려워지면 놀라고 당황하기 마련이라 증상이 나빠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고 한다. 너무 많이 들이쉬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내쉬어서 생기는 문제도 세상에는 있었다.
증상은 생소한데 조치 방법은 낯설면서도 단순하다. 비닐 등 봉투를 부풀린 후 자신의 숨으로 호흡하는 것이다.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쉬어서 폐포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올리기. 그 후에는 설득이나 설명을 해서 안심시키고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데 증상을 겪는 당사자는 숨이 안 쉬어져서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되는 일. 숨을 너무 많이 쉰다는 건 소리 없는 비명처럼 고독한 괴로움이었던 것이다.
과호흡 증후군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과호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는 남 얘기의 여유로움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고 천천히 숨 쉬듯 돌아보면 '숨이 잘 안 쉬어져'라며 울상을 짓는 내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이해받지 못하는, 설득할 수 없는 상대를 두고 슬픔에 북받쳐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기분이라고 고백하는 나. 과호흡 증후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그런 기분, 마음이 아니었을까.
앞서 적은 것처럼 과호흡의 해결은 내가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쉬는 것으로 시작된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기 위해 초보 러너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폐가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 될 때까지 죽을 듯이 달린다. 하지만 그런 달리기는 러너를 멀리 데려가기보다 중간에 멈추게 한다. 멈추게 할 뿐 아니라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소진시켜 버린다. 때로는 뼈나 관절, 근육을 다치게 한다. 건강을 위해 시작했을 달리기가 정도를 지나치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적당한 스트레스와 압박은 마음과 능력을 향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스트레스 요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 속에 불안을 일으키는 일들과 사람들은 매일 늘어나는데 그로부터 나와 우리를 지킬 힘과 도움을 줄 사람은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홀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불안을 견디며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이어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지쳐간다.
몇 년 전의 나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는 자발적으로 달리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지만 결국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끌려다니기 일쑤였고 호흡의 균형이 깨져서 괴로움을 호소하는 스스로에게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며 엄격하게 굴었다. 자신이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쉬는 것과 같은 휴식이나 돌아봄 없이 부족한 건 산소라며 더 많이, 더 빨리 숨 쉬는 방법을 찾아다니듯 사람들 속에 휩쓸렸다.
달리는 법만 배우고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불안을 이기기 위해 어쩌면 더 큰 불안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세상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것이다.
이전 글에 '첫울음 이후 오늘까지 숨을 쉬는 데 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다'라고 적었는데 어쩌면 그건 그랬다고 믿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속인 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자주 울던 내게 누구도 울음을 그치는 좋은 방법으로 천천히 숨쉬기, 깊이 숨 쉬는 심호흡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뭘 그런 걸로 울고 그러느냐"거나 "빨리 울음 안 그치면 혼난다"거나 "울고 싶을 때까지 울어라"는 식의 반응은 제법 기억에 남아있다. 우는 내게 필요한 건 안심, 불안을 이겨낼 신뢰였을텐데 울음이 그칠 때까지 눈앞에 머물며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의 얼굴이 기억에 없다. 배고프거나 보채는 나를 어머니는 안아주고 업어주셨겠지만 조금 더 커서 나이가 든 후에는 그런 교감의 기회가 사라졌던 것이다.
'이 사람만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게도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고 누구에게 전하려는 말인지도 알지 못하는 길 잃은 마음으로 눈먼 기도를 거듭하며 홀로 숨 가빠했던 짧지 않은 낮과 밤이 있었음을 이제야 안다. 아이가 울 때 두 번 혹은 세 번 천천히 숨 쉬라고 말하고 눈을 마주하고 지켜보려고 하던 내 행동의 이유와 마음의 근거도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알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아이에게 그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 머물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 많이 내쉬거나 너무 많이 들이쉬지 않도록 천천히 숨 쉬는 방법을 알려주고 기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너를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고.
울고 싶은 만큼 울고 그치고 싶을 때 그치라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안과 불만이 별 것 아니거나 별 것이었다 해도 함께 있으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느낄 수 있도록 자꾸 말하며 안아주며 곁을 지키겠다고.
아이를 향한 다짐이면서 나를 위한 다독임의 말을 자꾸자꾸 되뇌게 되는 유난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