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세 가지 요령

때로는 급하게 마시는 찬물에도 체한다

by 가가책방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경험적으로 뭐라고 말하든 나란 사람의 약한 면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드러난다.

어떤 약함, 얼마나 약함인가 하면 때로는 찬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체할 만큼 약하다. 오래전 티브이 속 누가 한 얘기처럼 물을 고기 씹듯 천천히, 수십 수백 번씩 꼭꼭 씹어 마신다면 그런 일이 적겠지만 절대 찬물을 마시고 체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 찬물을 급하게 마셨다면 더욱더.

갑자기 드러날지 모르는 스스로의 약함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오래전부터 급하게 뭔가를 결정해야 하거나 갑자기 바뀌는 게 싫었다. 바꾼다고 해도 스스로 떠올리고 생각해서 내 속도로 결정하고 싶었다. 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그렇기를 바랐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따라 갑작스럽게 약함이 드러나는 게 무서웠다.


유명한 시의 구절과 달리 내 마음은 호수 같지는 않았다. 잔잔하기보다 소란하고, 고요하기보다 시끄러웠다. 나이가 들면 무던해진다는 말이 무색하게 마음은 점점 더 소란하고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며 "보통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조언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도 그게 잘 안 됐다. 생각을 늦출 수 있기를 바라지만 주변의 소란과 소음에 너무 쉽게 자극받고 반응했다. 생각은 즉시 떠올랐고 불안해졌으며 복잡해져서 포기하자는 마음과 그럴 수 없다는 오기가 자꾸 다퉜다. 세상에도 마음에도 평화가 없는 온통 소란한 나날. 그래서 고민한 게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이었다.

첫 눈부터 이럴 일?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이 두 가지 질문이 세 가지 요령으로 이어진다.

질문 하나는 "언제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는가?"라고 둘은 "어떻게 생각의 속도를 늦출 것인가?"다.

처음에 떠올린 질문은 달랐다.

하나는 "언제 생각의 속도가 빨라지는가"라고 둘은 "왜 생각의 속도를 늦춰야 하는가?"였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처음에 떠올린 질문은 생각을 빠르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빨라지는 순간이 너무 많아서 이것 같고, 저것도 같고, 또 이런 경우도 있는 것 같아서 끝이 없었다.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왜?'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생각을 늦출 때 일어나는 좋은 일들, 긍정적 변화들, 어쩌면 일어날지 모를 희망찬 가능성들이 마구 떠올랐다. 동시에 그런 이유들에 반발하는 이유도 생각나기 시작했다. 생각의 속도가 빠를 때의 좋은 점, 가능성들이 '꼭 생각의 속도를 늦춰야 해?' 하며 설득력 있는 가설들을 늘어놓았다. 생각의 속도를 늦추겠다고 질문을 던져놓고 오히려 생각만 빠르고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언제 와 어떻게로.


언제 생각의 속도가 늦춰지는가.

처음은 나와 무관한 시대의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다. 쉽게 나눠서 고전 소설이라 부르는 장르의 책들을 읽으면서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는 걸 느낀다. 철학의 담론이나 시대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쓴 난해한 책은 예외다.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 사랑하고, 미워하고, 고뇌하고, 방황하는 나와 비슷한 면모를 지닌 전혀 다른 세계 속 사람들의 이야기에 호흡은 차분해지고 생각은 멀어지고 느낌은 가까워진다. 여기에는 특별한 읽기의 요령이 필요한데 느리게 읽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느리게 읽을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머릿속으로 소리를 내면서 읽는 것이다. 밖으로 소리 내어 읽거나 쓰는 게 편한 사람이라면 손으로 쓰면서 읽어도 좋다. 다만 내 경우 소리 내어 읽기나 쓰면서 읽으면 소리 내는 데 정신이 쏠려서 뭘 읽었는지 잊거나, 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읽은 부분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피하는 편이다.

나와 무관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오히려 그 이야기에서 떠오른 내 경험과 기억에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아, 나도 저런 생각을 했던 거군!' 하며 복잡하던 생각이 명료해질 때도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먼 나라, 옛날 사람이 쓴 책 속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닮은 이유로 괴로워하거나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적잖은 위로가 되어줄 뿐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향한 경계심을 느슨하게 만든다. 긴장했던 감각과 신경이 기억과 경험을 오가며 이완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기 위해 혹은 감동을 느끼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의 효용은 그런 면모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가벼운 공감에서 오는 동질감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 요령은 나와 무관한 시대 속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는 속도로 읽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싫은 것을 두고 그럼에도 어떤 점은 좋았다며 중립에 서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쪽으론가 기울어 있음을 받아들이자.

따뜻해서 계절을 착각한 흰 철쭉

또 언제 생각의 속도가 늦춰질까.

다음은 맨밥이나 찬의 가짓수가 적은 밥을 혼자 먹을 때다. 중요한 건 밥만 먹는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있는 영상이나 자극적인 뉴스,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은 잠시 멀리 둔다. 밥을 먹는 이유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같은 단순한 것일수록 좋다. 조미된 편의점 김밥이나 볶음밥보다 비빔밥이나 오히려 맨밥이 더 낫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결혼 전에는 혼자 밥 먹는 일이 흔했다. 결혼하고 아이가 일반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란 후에는 드물어졌다. 혼자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는 몹시 드문데 그 드문 순간에 생각의 속도가 늦춰지다 못해 멈춘 듯한 경험을 몇 번쯤 했다. 항상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건 아니어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위에 적어둔 것 같은 몇 가지 조건들이 있었다. 영상을 보거나 뭘 읽거나 반찬을 새로 하거나 먹어야 하는 가짓수가 많을 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아직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먹는다는 것에 본의 아니게 집중하게 된 상황, 맨밥을 씹기에 더 오래 머금고 더 여러 번 씹게 되면서 쌀밥이 갖고 있는 고유의 단맛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만든 우연 아닐까 한다.

멍함에 가까운 상태로 수십 번씩 턱을 움직여 한 수저의 밥을 목 뒤로 넘기는 단순한 과정의 반복. 거기에는 밥을 뜬다. 입에 넣는다. 저절로 삼켜질 때까지 많이, 여러 번 씹는다. 단지 반복만 있을 뿐이다. 고민하거나 돌아보거나 후회할 여지가 없다. 거기다 충분히 씹어서 삼켰으므로 소화불량이나 탈이 날 걱정도 없다. 소박함을 넘어 단순한 한 끼가 그보다 완벽할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식으로 밥 먹는 일이 잦아지면 문제가 된다. 영양의 부족 혹은 불균형에 시달릴 수 있고, 너무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과 밥 먹는 시간이 어색하고 불편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어차피 먹는 밥이라면 더 맛있는 것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 좋다. 그러나 먹는 것의 본질은 만족이나 친목에 있지 않고 생존에 있다. 맛있는 것들은 더 다양한 자극을 품고 있다. 인공 조미료나 첨가물의 자극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자극에 노출된 감각은 점점 둔해지기 마련이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아밀라아제의 작용으로 느낄 수 있는 쌀 고유의 단맛을 잊고 더 강한 단맛을 찾는 식으로 말이다.

두 번째 요령은 자발적으로 홀로, 초라하고 쓸쓸한 식탁 앞에 조용히 앉는 것이다. 반찬은 부족해도 밥은 넉넉히 준비할 것이며 입 안에 밥이 사라지기 전에 새로 한 수저를 입 안에 넣지 않아야 함에 주의하자.

사실 마지막은 아이와 놀 때라고 쓸 셈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해서 요령이라고 하기에 어울리지 않을 듯싶어 한 번 더 생각했다. 그러다 MBTI와 심리테스트 같은 사람들을 몇 가지 성향으로 분류하는 유행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마지막은 일기가 아니라 계절에 말을 거는 것이다.


여기서 일기는 매일 쓰는 글의 일기가 아니라 하루의 날씨의 일기다. 일기 예보를 못 듣고 오늘 얇은 외투를 걸치고 나갔다가 꽁꽁 얼어 들어온 사람이라면 특별히 소중해졌을 그 일기.

그날의 날씨가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가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맑거나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혹은 춥거나 덥거나 하는 하루하루의 변화에 민감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서 생겨났을까 떠올려 보는 것이다.

일기 예보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우산 장수와 소금 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의 걱정에 대한 이야기다. 비가 올 때는 우산 장수 아들은 돈을 벌겠지만 소금 장수 아들은 장사를 망칠 것을 걱정하고, 비가 안 올 때는 소금 장수 아들은 돈을 벌겠지만 우산 장수 아들이 빈 손으로 돌아올 것을 걱정한다는. 두 아들의 생업 때문에 어머니는 어느 쪽도 반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도 흔히 일어난다. 예를 들면 예보에 비가 올 거라고 해서 아침부터 우산을 챙겨 나온 하루를 떠올려보자. 예보가 맞아서 우산을 유용하게 쓰게 되면 우산을 가지고 나온 자신을 칭찬한다. 예보가 틀려서 우산이 하루 종일 짐이 되면 일기 예보를 탓한다. 일기 예보를 못 듣고 나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에 곤란해지면 내리는 비를 탓한다.

잘 대비한 나를 뺀 대비하지 못한 나와 대비할 수 있도록 알려주지 않은 일기 예보는 비난과 원망, 후회의 대상이 된다. 그런 일상들이 나에게도 흔했다.


일기예보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건 날씨라는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불안을 제거하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다.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창문에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고 병에 걸려 목숨을 잃어버린 화가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예측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작은 곤란조차 피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1년 365일의 일기에 만전을 기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으므로 주기를 늘려보자는 생각이다.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의 영향으로 뚜렷하던 우리나라의 사계절도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로 24 절기의 때마다 예측되는 큰 변화들은 일어나고 계절마다 기대하거나 마음을 비워야 하는 일들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일기가 아니라 계절에 말을 걸자는 이야기는 이런 의미다. 하루하루의 날씨 예측,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준비하거나 준비의 부족 혹은 잘못을 후회하기보다 계절의 큰 변화를 기다려보면 어떨까 하는.


봄에는 얼었던 땅이 녹고 꽃이 핀다. 여름은 덥고 습하고 비가 자주, 많이 내리고, 모기도 많지만 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햅쌀과 과일이 많이 나고, 겨울은 춥고 길지만 겨울만의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기. 너무 당연한 얘기라 이렇게 늘어놓았더니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일들을 예상하고 덜 놀라는 일. 일기에 무던해지고 계절의 변화에 반갑거나 아쉬워하는 순간을 더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조금 편해지는 것이다.


막상 갑자기 추워지니 또 놀라고 긴 겨울이 걱정도 되고 내일이나 모레나 혹은 그다음 날에 큰 눈이라도 내려서 길에 나서는 게 어려워지지 않을까 도움 안 되는 고민도 떠오르지만 그럼에도 겨울은 춥기 마련이라는 단순함으로 일기 앞의 일희일비를 줄여 가는 게 요령 아닌 요령일 거라 믿으며.


세 번째 요령은 하루하루의 날씨에 딱 맞추기보다 계졀의 큰 변화를 따라 약간의 여유를 두는 것이다. 여름에는 작은 우산 하나를 늘 가방에 넣고 다니고, 겨울에는 목도리 하나 장갑 하나를 빼놓지 않으며 봄과 가을에 오는 가는 비는 유럽 사람들처럼 끄떡없이 맞아보기. 예측하지 못한 비를 원망하기보다 같이 우산을 쓰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는 게 요령(이건 지금 상상해 본 요령이라 실제로 실험해 보고 후기를 남기기로)
서리 맞은 김에 분신 대량 생산

살면서 배우는 게 적지 않듯, 쓰면서 알게 되는 것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