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 않은 날에도 슬픔에 대해 쓰자
슬픔에 대한 글은 슬프지 않은 날 적어야 한다.
슬픈 날에는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변과 세계의 슬픔에 아랑곳하는 일 없이 슬픈 나만을 위로하는 글은 글이 되지 못하고 글자의 나열에 머문다. 글이 되지 못한 글자의 나열은 소리 없는 비명이다. 글이 되지 못한 글자의 나열도 소리 없는 비명도 슬픔에서 나를 건지지 못한다. 들여다볼 수 없는 것, 해석할 수 없는 건 잠시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건 아직 글감이 아닌 것이다.
그럼 슬프지 않은 날은 언제인가.
슬플 마음을 먹는 게 아니어도 슬프지 않은 날이 드물다. 밝은 빛보다 그늘을 들여다보는 습관 탓에 마음을 대할 때도 그늘진 데로 눈이 간다. 그 그늘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늘 슬퍼야 하는 이유가 떠오르는 것이다. 하거나 하지 않았거나 해야 했거나 하지 말아야 했던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뒤섞여서 결국 슬픔이 된다. 모든 색을 섞어서 만드는 검은색처럼. 결국 슬픔에 대한 글은 쓰지 않는 것이 쓰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되고 만다.
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수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사람의 몸은 물보다 무거워서 저절로 뜨지 못하고 가라앉는 게 당연하므로 수영을 배워야만 물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떤 뉴스를 보는데 엄마 뱃속 양수가 꼭 물과 같아서 그 안에서 헤엄치듯 머물렀던 아기들이 본능적으로 물속에서 몸을 띄울 줄 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뉴스 속에는 수영을 하는 아기들이 있었다. 몸에 밴 본능은 엄연한 현실이자 사실이었던 거다.
우리 삶에는 크고 작은 기쁨과 즐거움과 크고 작은 슬픔의 이유들이 뒤섞여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기쁘고 즐거우면 몸을 흔들어서 기쁨을 표현하고 슬프면 울어서 쏟아낸다. 그런 건 특별히 아이들이 수월히 해낸다. 서툰 건 오히려 어른들이다. 몸을 흔들기 부끄러워서, 눈물을 쏟아내면 약해 보일까 봐, 이유는 끝이 없다. 이유가 생기면 강해지는 걸까. 그래서 울거나 웃지 않고도 견딜 수 있게 되는 걸까.
"나를 둘러싼 모든 공기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같은 겉멋 든 생각을 끄적이고 다니기 시작한 건 아마 어른이 된 후였을 것이다. 구차한 이유보다 그럴듯해 보이는 문장을 찾다 떠올린 그럴듯한 문장.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그것을 난해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의 나를 위한 감정, 그것에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하지 못하며 위로할 수 없는 나만의 슬픔. 그 슬픔은 마치 주술의 주문처럼 '나만의 슬픔'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을 것이다. 이해받지 못할수록 슬픔은 진짜가 되고 결국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공기가 슬픔을 머금게 만들었던 거다.
아이는 1초 만에 온몸으로 울 수 있다. 아이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공기가 슬픔을 머금은 정도가 아니라 아이 자체가 슬픔이 된 듯 1초 전에는 웃던 아이가 1초 후에는 절망에 빠져 우는 거다. 우는 이유는 그때마다 다른데 아이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운다. 이유를 묻는 건 늘 나다.
"도대체 왜 우는 거야?"
1초 전에 그 즐겁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당황해서 물어보면 아이는 그 물음이 더 서럽게 울 이유가 되었다는 듯이 더 크게 운다. 아이는 한결같이 충실하게 운다. 우는 자신에게 충실하다. 당황한 나는 이유를 묻다가 제멋대로 떠올린 이유들을 말하며 이걸 들어주면 되느냐 저게 문제였느냐 거듭 물어본다.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울음만 키울 뿐이다. 결국 이걸 해줄까 저걸 해줄까 묻게 되는데 어느 순간 아이 귀에 뭔가 마음에 드는 단어가 들리면 신기하게 울음이 멎는다. 지금은 허허 웃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보게 되는 상황인 셈이다. 그냥 울고 싶은 기분이라 울었더니 아빠가 뭔가를 해주겠다고 하는 상황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날까. 울 이유가 없어도 찾아서 울 일이다.
사실 아이는 때가 되면 저절로 울음을 그쳤으리라는 걸 안다. 지금 아는 걸 전에도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기가 본능적으로 물 위에 몸을 띄울 수 있듯, 눈물 흘리다가도 때가 되면 울음을 그치듯, 어떤 일들은 이유를 묻거나 뭔가를 해주기보다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듯하다. 우는 아이의 모습에 당황해서 얼른 달래러 가는 건 육아에 익숙하지 못한 초보의 행동이다. 얼마간 울면서 아이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도록 차분히 기다려주고 그 후에 안아주고 아이 말을 들어주는 게 더 현명한 행동이다. 아이를 대할 때만이 아니라 나를 대할 때도 그렇게 하는 게 더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더 알게 됐다. 다 큰 어른이 슬픔을 이유로 어리광 부리고 투정하는 건 외로워서거나 화가 나서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지 슬퍼서가 아닌 것이다. 솔직하지 못해서인 거다.
아이의 울음은 솔직하다. 어린아이일수록 더 단순하다. 슬픔을 구실 삼아 우는 게 아니라 울고 싶어서, 눈물이 나서, 그런 기분이라서 울기에 금세 웃을 수 있다. 1초 만에 온몸으로 울던 아이가 다시 1초 후에 온몸으로 웃어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아이에게는 웃음도 울음도 그 순간에는 전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게 울 일이야?"
그게 울 일이어도 괜찮다.
특별히 울거나 웃을 이유를 찾지 않고 다만 표현하고 쏟아내기.
부끄럽지도 약해 보이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기.
울음이 흔한 어른이 되기.
이렇게 별 것 아닌 작은 다짐에 닿았다.
슬프지 않은 날에도 슬픔에 대해 쓴다.
우리 이야기에서 우리의 슬픔을 빼면 오히려 그게 서운해서 눈물이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