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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Dec 09. 2023

넓은 하늘과 여유로운 마음

힘 빼고 천천히

 이만큼 적어도 필요 없는 힘이 빠지지 않고 딱딱한 글이 되는 건 재능의 문제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도 강습 때마다 '몸에 힘을 빼세요'라는 얘기를 들었다. '몸에 힘을 빼면 팔이며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나요?' 하고 물으면 힘을 주되 힘을 빼야 한다는 알쏭달쏭한 답이 돌아오곤 했다.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달 후에는 킥판 없이 물에 뜨게 됐고 두 달 후에는 평영, 배영, 자유형의 기본자세를 익혔다. 세 달이 지났을 때 50미터 레인 중간에서 멈추지 않고 한 바퀴를 돌 수 있게 됐고, 네 달쯤 되자 물을 덜 먹게 되었다. 수강 반도 바뀌어서 입문에서 초급, 중급반이 됐다. 중급반 두 달째, 수영 육 개월 차에 비로소 몸에 힘을 빼는 게 뭔지 조금 알게 됐다. 쉽게 말하면 '긴장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하라'는 얘기라는 걸 말이다. 이해가 가면서 동시에 왜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는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긴장하지 말자고 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이미 초보가 아닌 것이다. 


 '잘한다'는 말이 '쉽게 해낸다'가 아니라 '제 실력을 낸다'라는 의미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처음부터 잘하는 재능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해내는 건 재능만으로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티브이 속 유명한 배우나 운동선수들을 보며 별생각 없이 '재능이 정말 남다르다'거나 '재능을 타고났다'라고 얘기하거나 생각한 적이 제법 많다. 단지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빛나는 재능처럼 보이는 풍경에서 노력이라는 배경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야트막한 동네_4층 동네 뷰

 서울을 떠난 후 가장 흔히 부리게 된 사치는 매 순간 넓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빌딩이나 아파트 숲, 빽빽한 건물 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이 아닌 눈 닿는 곳 끝까지 온전히 하나로 이루어진 넓은 하늘.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고 한 번도 쪼개진 적이 없음에도 대도시에 살며 올려다보는 하늘이 조각나 있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느낀 순간이 많지 않았다. 서울의 어디를 가든 도심이라면 다 그런 모습의 하늘을 이고 있으므로 천변을 걸을 때나 강가를 찾았을 때 보이는 넓은 하늘이 조금 더 자유로워 보였을 뿐이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넓은 하늘과 어디선가는 보게 되는 넓은 하늘에 차이가 있을까? 의식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내겠지만 무의식에서는 그 차이가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한다. 탁 트였다는 건 순간 무릎을 탁! 칠만큼 명료한 것이다. 풀리지 않던 의문이 순간적으로 탁! 풀리며 개운해지는 느낌이 탁 트인 느낌인 거다. 조각난 하늘 아래서 끙끙 거리는 것과 온전한 하늘 아래서 개운함을 느끼는 건 잠깐은 큰 차이가 없을지라도 오래되면 차이가 생겨날만한 감정적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는 곳이 대도시일수록 개방감 있고 탁 트인 곳을 주기적으로 찾아다닐 필요가 있다. 여행이거나 산책이거나 의식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하나 더 생겨나는 거다. 지금 사는 곳에서는 하늘을 보기 위해 노력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다. 집이든 어디든 나서면 늘 있으므로.

공주금학초등학교에서

 문 밖으로 나서면 만날 수 있는 하늘 같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변덕을 부리는 날은 그런 날대로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그걸 옮겨 적거나 뭔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으면 했다. 그러기를 제법 오래 계속했는데도 힘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뻣뻣하고 딱딱하게 움직이는 팔다리처럼 노골적인 의도가 엿보이거나 가르치는 투가 되거나 자연스럽지 않은 글이 되어버리는데, 그게 놀랍지도 않다. '너는 깊이가 없다'는 말이 듣기 싫은 거냐라는 질문에 '나란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생겼을 뿐'하는 답이 돌아오는 실정이니 손 쓸 수가 없다. 조바심에 쓰기를 쉬곤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다시 수영을 처음 배우던 기억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힘을 빼라는 얘기를 들어도 뺄 수가 없었다. 힘을 왜 빼야 하는지 몰랐고, 어디서 힘을 빼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고, 어떻게 힘을 빼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물속에서 움직이기를 계속 연습했더니 수영을 할 수 있게 됐다. 수면에 닿을 때마다 철썩거리던 팔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첨벙 거리던 다리가 조용히 움직였다. 나를 헤엄치게 해 준 건 재능이나 이해력이 아닌 연습이었던 것이다. 


 제법 오래, 상당히 많은 걸 써왔다. 그럼에도 힘이 빠지지 않아서 딱딱한 글이 되는 건 확실히 재능이나 감각의 영향이 크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부족한 건 재능이 아니라는 생각도 확고하다. 내게 부족한 건 연습이다. 많이 쓰는 노력이 있어도 부족한 연습 탓에 노력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만큼 해도 안 되면 그만두는 게 맞지 않아?"

 실제로 그만두고 지낸 시간이 있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내일 혹은 다음으로 쓰기를 미루고 결국 쓰지 않기를 반복하다 보니 쓰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됐다. 정말 좋은 생각이라서 이대로 잊어버리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가도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려서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쓰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큰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아무 일도 없이 내내 평화로웠던 거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좋은 생각을 놓쳤다며 화낼 일도 없고, 그 좋은 생각을 살려내지 못하는 못난 글솜씨에 자괴감을 느낄 것도 없어서 관계와 마음마저 편안했다. 


 쓰지 않아도 나쁘지 않지만 쓰면 조금 더 좋은, 딱 그 정도의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이제 생각해 보면 새삼스럽지만 내가 쓰는 글에는 여유가 별로 없다. 스스로는 똑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지만 읽다 보면 막연해서 답답한 느낌이다. 탁 트인 넓은 하늘을 매일 보며 쓰는 글이 골방에서 보냈을 퀴퀴한 느낌을 품고 있다니.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오해 없이 명료하게 전달하는 게 늘 어려웠다. 건조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근거를 덧붙이면 명료해질 거라고 믿고 그렇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새삼 묻게 된다.

"감정에 중립이 있는가?" 


 태생부터 치우칠 수밖에 없는 감정에게 편차와 기복을 줄여 무난하고 단조로우며 예측가능해지라고 강요해왔는가 보다. 느긋하지도 여유롭지도 못한 게 나올 수밖에. 

 인생에는 연습이 없더라도 글 쓰는 인생에게는 연습이 허락된다. 내게 주어진 삶은 여전히 남아있고 연습으로 끝난다고 해도 슬프지 않으므로,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어제 본 흐린 하늘을 닮은 글을 쓰는 중이라 생각하며 오늘의 연습을 마무리한다. 내일 하늘이 맑고, 떄마침 내 마음까지 맑으면 또 무엇이 나올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니 그건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수석이 아니면 현수막이 걸리지 않는 학교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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