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를 보고 무엇을 만지고 있을까
유난히 올해는 달력 마지막 날에 가까워질수록 바빠졌다. 바빠지면 책과 보내는 시간에 소홀해진다. 본업이 책방지기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서 부끄럽다. 나를 구해주는 존재가 없었다면 책방지기 D 씨는 부끄러움에 빠져 한참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익명을 요구한다. 책방지기 D.
잠들기 전 꼭 책을 읽어줘야 하는 존재. 한글도 모르면서 읽어주는 사람이 없는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공들여 넘기는 존재. 한 번 좋아진 책은 수백 번 읽어서 닳을 때까지 읽기를 즐기는 존재. 어디서 생겨났는지 늘 핑계 많고 이유가 끊이지 않는 나를 책 앞으로 끌어 앉힌다.
이번 책은 출판사 무제 박정민 대표가 추천한 『코끼리를 만지면』이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과 '진짜' 코끼리를 만져보고 그린 그림들과 이야기가 담겼다. 코끼리를 몇 번이나 본 나는 책을 펴기 전까지는 별 감흥이 없을 줄 알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봤고, 옛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넷을 불러다가 저마다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지게 했다는 어느 이름을 잊은 왕 이야기가 주는 교훈도 안다고 믿었다. 옛이야기가 주는 교훈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아이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같은 그림을 보고 적힌 글자를 읽어주는데 아이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뭐가 웃기는지 자꾸 웃다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코끼리를 같이 그리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정작 자기는 바다와 제민천을 그렸다. '이게 뭐 하는 건가'하며 코끼리 생김새를 물어보는데 코끼리에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무지개도 그려야 하고 요구가 많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코끼리 똥을 그렸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다리에 돌고래 세 마리를 그렸더니 자기는 무지개 돌고래란다. 귀도 하트 모양이고 바다도 하트 모양이다. 숲 속 집과 바다의 시작은 내 상상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마음으로 마음대로 그렸더니 코끼리가 아니라 세상이 됐다. 마지막에 더 물어보려고 했더니 자기는 제민천을 그려야 하니 말 시키지 말라고 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그 시간이 무척 좋았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코끼리 겉모습은 포기하지 못했지만 그 안의 세계는 넓어졌다. 이쯤 되면 코끼리 발톱 정도는 만져봤다고 말해도 되는 거 아닐까.
코끼리를 안다고 믿는 나는 코끼리 책을 봤으니 코끼리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코끼리를 만지고 코끼리를 그린 그림을 보고는 바다와 제민천을 그렸다. 마치 같은 책을 읽고 전혀 다른 독후감을 써낸 두 사람 같았다. 독후감만 보면 같은 책을 봤다고 믿기 어려운 상태. 나는 책 속 코끼리를 충분히 잘 만졌던 걸까. 여기에 맞고 틀리거나 옳고 그른 게 있는 걸까. 옳고 그름은 무엇이 될까.
제법 잘 알게 됐다고 믿던 삶이 문득 낯설어지는 건 삶이 아주 커다란 코끼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발등이나 무릎에 올랐을 뿐이라는 식이다. 새삼스럽게 가장 잘 안다고 믿어질 때, 확실하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야말로 의심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말을 진리처럼 다시 보게 된다. 난 삶의 어디쯤에 있는 걸까.
내 삶이 벼 이삭인 줄 알았는데 갈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상황 같다. 가을이 되어서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게 되는 줄 알았는데 바람에 흩날릴 준비를 하느라 잠시 기울어졌던 것뿐인 현실. 운이 좋아야 볍씨가 되어서 봄에 싹을 틔울 줄 알았는데 홀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꿈꿔본 적도 없는 새 세상에 뿌리내리는 기적을 만나는 기분. 가능성이란 가능한 것 안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가 가능하지 않은 것마저 이뤄지는 게 가능성이라는 걸 확인받는 나날들. 해를 넘기기 전에 한 번은 확인해두고 싶었다.
나는 벼. 어쩌면 갈대. 바다 아니면 숲. 돌고래이거나 새. 운이 좋으면 코끼리 똥. 아이에게 제일 큰 웃음을 준 코끼리 똥이어도 좋다. 내가 만지든 만져지든, 살아있음과 여전히 꿈을 꾼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날인 오늘도, 첫 날인 새해에도 나는 꿈같은 코끼리 만지기를 계속할 셈이다.
이건 비밀이지만 당신에게만은 알려주고 싶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코끼리가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당신에게도 비밀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코끼리의 비밀도 알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