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칼럼
단순히 '읽는 것'은 삶 가운데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정말 단순하게 '읽기 능력'을 키우려고 하는 것이라면 읽을거리를 골라서 읽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정석'처럼 추천되어 온 신문을 읽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신화만큼 허황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단순히 '읽기의 대상'에 그친다면 말이다. 읽기란 무수한 사고, 생각의 단초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입구라거나 과정이지 완결된 행위가 아니라는 거다.
나에게도 주체하기 힘든 '다독의 욕망'이 있다. 깊이 읽으면서 빨리 읽고 싶다는 욕구를 만드는 욕심의 공장이 바로 그 욕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읽은 것을 통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거나, 다르게 생각했던 것, 보지 못했거나 잘못 보고 있던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읽기가 생각하기로 이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변화'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읽기 전과 다를 바 없이 되거나 오히려 못한 처지에 놓이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불확정성'이다. 생각이란 해석하기에 따라,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그 변화는 무한하고, 한계가 없으며, 어느 것이든 절대적으로 옳거니 그를 수 없다. 결국 모든 불가능이 가능하며, 모든 가능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거다.
생각이 이 지경에 이르면 그 사람은 거의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게 된다. 확실한 것, 확정 가능한 것, 이름하여 '정답', '결론'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시, 하나의 소설이 삶을 바꾼다는 건 상징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화다. 근거는 있으나 믿거나 말거나인 셈이다.
읽기에서 생각하기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생각이 본래의 사고를 뒤집고, 행동을 고친다면 변화가 시작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근본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읽는 행위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읽기는 결국 간접 경험이다. 그것이 아무리 생생한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간접적이란 한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익히 알고 있다. 실제 체험조차, 경험조차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일이 허다함을.
읽기에서 생각하기로, 생각하기에서 행동하기로, 행동하면서 애쓰는 과정까지를 연결할 수 있다면 비로소 '조금'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읽기를 통해 변하고자 하는 생각, 변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오래전에 포기했다. 오직 내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의지해 왔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음을 매 순간 깨닫는다.
이제는 생각이라는 이상과 현상이라는 현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더 버겁다는 생각으로 힘겨워하는 날을 보내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가끔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책 속에 길이 있음은 알겠으나 그 길은 무수한 갈림길로 되어 있다.
세상과 다를 것이 없기에 그 속에서도 매 순간 무수한 선택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는 매 순간마다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어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 눈이 자꾸 마주치는 건너편 테이블의 여자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혼란은 책에 빠져들거나 그 여자가 사라지거나 하기 전에는 그치지 않는다.
삶 속의 고민이 삶이 끝나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론?
(그런 결심이 어느 날 들이닥칠 끝 앞에 무의미함을 앎에도 그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