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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pr 09. 2019

집에는 별고 없으시지요?


집에는 별고 없으시지요?          2011년 8월 24일, MID-INDIAN OCEAN에서


 열흘 가까이 계속되는 악천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별로 쉴 틈을 주지 않고 선수로 넘어오는 높은 파도는 여전하죠.


 뿐만 아니라 계속된 강풍과 소나기 때문(?)인지 선교 앞 유리창으로 물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아젤리아는 천정으로 물이 샜었고 브레이브는 닥트 킬로 물이 들어왔었으니 창문으로 물이 새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오기 전에 선교 가운데 유리창이 강풍으로 깨져 나갔었다는 이야기는 애교로 들어줄 수가 없더군요. 


 우리 회사가 중국 조선소에 수주해서 만들어진 네 척의 SUPRAMAX급 Bulker들 중에 이런저런 문제가 들려오지 않았던 배는 한 척도 없었습니다. Azalea, Brave, Champ, Daisy... ABCD순으로 세상에 선보인 이 배들 모두 이런저런 사소한 문제들에 계속 시달리고 있죠. 


 이제 마지막으로 태어났던 Daisy도 10월로 돌이 되니 어느 정도 문제점들을 개선했을 만도 하지만 화장실 하수도가 새서 침실로 배어든다더니, 배선도와 다르게 엉망으로 배선된 전기회로로 인해 여기저기서 어스 알람이 울린다든지, 선교 천정으로 비가 새고, 창문으로 물이 스며들어오는 등의 문제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ABCD 중에 이미 두 척을 경험해보고 있는 저로서는 '역시 MADE IN CHINA'라는 결론에 아주 쉽게 도달해버리죠.


 그런 ABCD들을 만든 저우산 도크는 예전에는 대형 원양어선을 만들던 도크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지은 대형선이 ABCD였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처음 짓는 배를 '일부러' 엉망으로 지었을 리는 없고 제 생각에는 딸리는 기술력 탓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AZALEA 승선 당시 서비스 엔지니어라고 20명 가까운 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도 선장님 방 물새는 것조차 잡지 못하고 내려가는 실상을 목도한 후로 그들의 기술력에 대한 의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문제에서도 전혀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스무 명의 '엔지니어'들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죠. 


 서비스 때문에 올라왔지만 아무 서비스도 못하고 - 실은 고치려는 의욕 조차 보이지 않더라고요- 내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중국도 예전의 우리나라처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지금의 최고의 품질을 이룩해낸 조선강국으로 도약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중국제도 지금 내가 만나는 것들과는 다를 것이다.라는 생각을 접어버렸습니다. 


 중국은 강대국은 될 수 있어도 선진국은 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 듯싶네요. 문제를 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팔 걷어 부치며 나서고, 이런 문제점들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모습을 그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대충 보고 시간만 때워도 월급은 나온다는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있는 '서비스 엔지니어'들을 보며 '한 가정에 하나의 아이'라는 중국의 정책이 낳은 소황제들의 세상을 맞아가는 지금, 결국 가짜 달걀과 산자이로 대변되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이런 품질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선 1위를 당당히 자랑하는 그들의 '품질'은 더 이상 두렵지 않죠 - 그런 품질에 시달리는 현실은 짜증스럽습니다만.


 하지만, 저는 머리(이성)가 없이 폭군으로 변해갈 중국은 두렵습니다. 이미 그런 징조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고 있죠.

힘 있는 자가, 돈 있는 자가 장땡이라는 그들의 논리는 이미 주변 나라와 세계로 그 시커먼 속내를 내 보이고 있습니다. 네 살짜리 머리에 천하장사의 힘을 가진 괴물이 바로 그들일 테니까요. 


 빗물이 새어들어오는 창문틀에 실리콘을 열심히 바르던 타수도 한 마디 하네요. 'FUCK'N MADE IN CHINA!'...


 현실은 미국도 국가부도 초입에 몰리고 유럽 연합과 일본도 불경기라 아우성치고 있지만 우리 회사의 ABCD 모두의 DISCH. PORT가 중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따위로 만들고 서비스를 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능력이 있는 나라, 지금의 현실이 낳을 그들의 과욕은 두렵지만 그 과욕으로 인해 기본을 지키지 않고 대충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이 그들을 파고드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하긴 끝없는 순환논리로 따지면 다시 그것에 이어지는 두려운 어떤 것이 튀어나오겠지 만요.


 다시 백파가 일어나네요. 슬슬 긴장 좀 해야 할 듯합니다. ^^


 아참.. 형이 북아일랜드에서 바꿨던 50파운드를 외환은행에 들고 갈 정도로 우울한 주머니 사정을 보이고 있는 모양인데,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제 통장에서 한 십만 원 빼서 슬그머니 쥐어주라고 해주세요. 지금 옆에 있으면 바닥까지 떨어진 달러를 쥐어 주겠지만......ㅎㅎㅎㅎ 그리고 아버지, 형, 막내 모두 석 달 계획 헬스, 클럽에서 몸짱 되길 바라고 있다는 것에도 열열한 응원을 보냅니다. 


어머니, 할머니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엄마는 아버지께는 맨날 메일 보내시더니 왜 제게는 안 보내시는 걸까요. ㅠ.ㅜ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고 화목한 우리 집이 되길 기원하며, 2011년 8월 24일, MID-INDIAN OCEAN에서, 둘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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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가 우리 집 마당 가에서 호박 넝쿨에 달린 작은 호박을 찾아내어 너를 만난 듯 반가워하며 웃고 계신 모습이다.

  둘째에게   2011.08.26


 이번 항차 네가 이루어 내는 대서양, 인도양 통과 항해는 좋은 날씨가 너무나 짧게 주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구나. 


 예전 회사의 누군가가 나 더러 쇠 떡(鐵德)이 많은 선장이라고 한 적이 있었 단다. 그래서인지 배를 타면서도 한 번에 심한 파도를 오랜동안 받아본 기억은 많지가 않구나. 사실 그런 상황은 배 타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크나큰 복이라 할 수 있으니 언제나 느긋한 마음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었던 셈이지.


 그렇긴 하지만 초급 사관 시절 중에 그런 험한 날씨에 담금질을 당한다면 나중 고급 사관 된 후 만나는 힘든 황천 항해도 무사히 이겨내는 경험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건 아빠의 경험이기도 하지. 그러니 믿고 열심히 이 모든 황천 황파의 항해를 이겨내라고 응원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려무나.


예전 범선 시대에는 초짜 선원이 승선하면 황천 황파에 이겨낼 수 있도록 훈련하는 방법으로 돛대에 오르고 내리며 줄을 잡고 묶는 법을 터득하게 했단다.


그러는 중 멀미에 쫓기어 빌빌대는 선원에겐 가차 없이 로프-예전엔 모두 마닐라 로프-로 두들겨 패었다는구나. 그 아픔이 멀미의 고통쯤 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어 줄 때까지 두드려 주면 더 이상 꾸물대지 못하고 작업에 동참하였다고 하더구나.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이지만.....


 지금 같은 인권을 제일로 생각하는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훈련 방법이지만, 사실 배를 타다 보면 조금은 지난 세월 군대 생활에서 기합을 필요악으로 치부하며 인정하던 경험을 터득한 세대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훈련 방법에 아련한 동경 감(?)을 갖게 되었던 일이 이따금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네가 타고 있는 배는 조선소를 빠져나온 지 이제 겨우 일 년을 넘기는 아주 신조선이므로 나타난 모든 고장이나 흠집은 전부 개런티 클레임으로 수리가 가능한 상황이지만 현실의 모든 중국의 조선소 형편으론 그 많은 클레임을 감당해 주기가 결코 쉽지가 않을 거라는 생각 되는구나.


 나의 학창 시절 우리 앞에 교수로 강단에 섰던 해양대학 초창기인 1,2기 선배들 중 실습 때 중국의 상하이를 기항했었다는 이야기로 하며 추억을 반추하셨던 분도 계셨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는 일제 치하 열강 4개국 조차지인 상하이와 거기에서 일본을 피해 가며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그리고 야담적인 이름을 날리던 주먹들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어쨌든 일제에 대항한 그들 모두에 대한 설익은 동경심을 가지며 언젠가는 나도 배를 타고 찾아가 봤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던 곳이 상하이었고 중국이었다.


 하나 내가 그런 갈망을 품었던 시절은 지난 세기인 60년대 초였고, 중화민국 대신 중공으로 통칭하던 우리나라와는 교류가 없는 적대국이었던 지금의 중공 정권이 들어서서 평정을 찾아가던 세월이었으므로 그곳의 기항이란 상상 속의 바람이었을 뿐이었단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중화민국이라 불러주며 형제국 같이 지나던 대만 정부와 절교하고 6.25 참전으로 원수와 같이 여기며 지나던 그들 중공과 수교를 하게 되어 영원한 친구도 또한 영원한 적도 없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지.


 그런 몇 년이 지난 후인 2002년도 여름. 나는 중국 다이렌(대련) 수리 조선소에 태풍에 당했던 우리 배를 끌고 들어가 약 3개월간 대대적인 수리를 했던 경험을 갖게 되어, 나와 중국과의 새로운 만남을 이루었는데 이 경험에서 느꼈던 감정 중에 많은 것이 지금 네가 너의 배를 가지고 느끼고 있는 그런 심정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구나.


 그중 가장 기본 적인 것이 자신에게 책임 지어진 일에 대해 끝까지 추적하던가 하여간 끝장을 내듯 살피는 일이 아주 모자란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단다.


 이런 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공산당 치하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가지는 비슷한 형편으로 최선을 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배급제도의 근성 발로인 것 같구나.


 그들의 사회체제가 적당히 일과 시간만 채우면 먹는 것이 해결된다는 사회에서 살고 있었기에, 힘겹더라도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의 더 많은 보상이 기대되는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들과는 결코 같은 사고방식을 공유할 수가 없었던 게지.


 앞으로 언젠가는 꼭 이룩되어야 할 남, 북한이 통합된 한나라로 되는 세월 중, 아마도 한 동안은 이런 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통일 후의 발전 시간이 그만큼 저해받지 않을까 짐작해 보게 되는구나.


 또 한 그 석 달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시내 나갈 때마다 거의 만날 수 있었던 교통사고가 그곳 신문에서 사고의 뉴스로 나타난 것을 보지 못했기에 어쩐 일일까 알아보니 그런 뉴스는 될수록 신문에 올리지 말도록 일종의 언론 검열이 있다는 식의 말을 들었었지. 


 요사이도 중국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도 그런 언론의 통제가 그들 사회에 알게 모르게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종종 만나지만 한편 중국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일에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체취가 풍기는 중국의 대처 능력과 방법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당장 우리의 역사와 생활에 끼쳐질 악순환을 생각하려니 참기 싫은 아쉬움과 말하기 싫은 두려움이 안개같이 피어오르기도 하는 데 그건 네가 두려워하는 순환논리와 같은 것일 게다. 


네 형이 파운드화를 바꿔보려 한 것은 주머니 사정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대로 가지고 있어 봐야 가치나 더 떨어질 것 같은 생각에 알아볼 겸 은행을 찾았다가 그 돈이 영국 본토의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통용되는 것이라 바꿔줄 수 없다는 말에 약이 올라 이야기한 것이란 다.


그러니 너의 말대로 네 형에게 네 돈을 주지 않아도 될 게다. 고마운 네 맘만큼은 받아주도록 이야기 전달하겠다.


 할머니께서도 아직까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그래 틈틈이 안부의 편지는 잊지 말거라.


오늘 오전에 할머니는 너의 소식을 물으셨 단다. "둘째는 언제쯤 집에 들어오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난 후 곧 네 편지를 받았으니 할머니와 너 사이에도 반갑고 끈끈한 텔레파시가 있었던 모양이지?


 그다음. 


엄마가 너한테 편지 안 쓴다고 항의(?) 하면서, 나에게만큼은 잘 보내시던 네 엄마 편지를 질투하는 말은 하지 말 거라. 


그건 엄마와 아빠가 묶어가는 부부사랑의 몫이란 거다. 그러니 너도 어서 너한테 만 열심히 편지 쓰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 다 놓으렴. 그게 더 빠르고 나은 진리의 방법으로 알아두거라. 


 너도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기를 바라며, 집의 모든 우리 가족을 대표하여 아빠가 보낸다. 201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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