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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pr 08. 2019

정말 화가 다시 치밀어 옵니다.

그 일을 네 생에 좋은 경험 삼아라


 항해가 길어지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많아지면서 또 밀린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일들이 눈에 띄곤 합니다. 

지난번, 브라질로 향하는 길에 OO에 급유차 들렸을 때 부식과 본드 품목도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곳에서 선식을 하는 한국 사람은 그 양반뿐이라 계속 거래로 찾게 되는데 예전에 탔었던 <씨. 로렐>에서의 기억인 유효기간이 다 된 맥주를 수급받았던 일로 인해 여전히 이미지는 안 좋은 채로 남아 있었죠. 


그런 마음 때문에 이번 부식과 본드를 신청하면서는 EXPIRE DATE를 확인하고 충분한 기간이 남은 것만 올려 달라는 REMARK를 달아 선적요청을 하였습니다. 


 당시 물품들을 수급하면서 그 점을 확인했었어야 했는데 벙커링 여섯 시간 만에 떠나는 데다 지병으로 갑작스레 하선하게 된 선원도 있고 해서 올라온 물건들을 일일이 살펴볼 시간이 없었고 출항 후 올라온 맥주들을 찬찬히 체크해 보니 죄다 올 9월에 유효기간이 넘게 되어 있더군요. 


 요즘 유효기간 도래한 품목은 도매상에서 땡 처리로 싸게 넘긴다는 말까지 들은 탓에 ‘싸게 사서 비싸게 넘기는 심뽀'로 비쳐서 은근히 부아까지 치밀었지만 확인하지 못한 것이 제 불찰인지라 그냥 덮어두고 지나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근자에 꽤나 까다로운 수속을 요구하는 브라질 검역에 부응해주려고 미리 체크하면서 새로 올라온 확인되지 않은 부식 목록을 면밀히 점검하다가 OO에서 올라온 참기름의 박스에 유효기간이 의도적으로 찢겨 나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뜨막한 마음에 일일이 병을 확인하니 역시나 유효기간이 일주일 정도 넘은 물건들이더군요. 


 게다가 부식으로 올라온 신라면... 박스에는 2011년 10월 21일까지라고 표기되어 있었지만 라면 봉투에 적힌 유효기간은 모조리 아세톤으로 지워진 상태로 남은 흔적이고 살펴보니 2011년 4월 26일까지의 물품이었습니다. 


 이미 유효기간이 석 달이 넘은 물건을, 박스만 바꿔서 올렸다는 얘기죠. 이쯤 되니 그동안의 안 좋았던 기억이 모조리 합쳐지면서 거의 증오에 가까운 심정으로 변하게 되더군요. 


O대 출신의 XX기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배에 승선했을 때, 올라오자마자 소주부터 찾았던 그 사람의 첫인상이 아예 ‘제대로 된 모습'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배를 탔던, 선원이었었다는 양반이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요?


 조리장 역시 예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일부러 라도 현지인 선식에 싣고 싶었다는 후문에선 정말 ‘한국사람’ 혹은, ‘학교 동문’이라는 이유로 동포들에게, 선후배들에게 사기 치는 인간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더군요. 


 우리 배 선장님께서는 예전 회사가 쓰러지면서 졸지에 OO에서 배와 더불어 미아가 되었던 시절에 그분에게서 받았던 도움이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었기에, 그에 대한 조리장과 제 분노 앞에서도 참으라 하셨지만, 다시는 정말 다시는 이 양반과 거래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일항사는 전 배에서 선장님이 이런 일들을 이미 여러 번 겪고 리처드 베이 입항 시에 일부러 필리핀계 선식을 불러서 부식을 신청했었다 던 얘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이런 일들을 벌여왔기에 어느새 선원들로부터 곱지 않은 눈길을 받게 되어 인심을 잃고 있다는 얘기죠. 


 이미 수십 년, 이런 식으로 동포들과 동문들의 등을 치면서 번 돈으로 얼마나 잘 살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자신도 배를 탔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이의 이런 모습이 돈은 자신의 주머니로 가져왔는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것을 잃고 만 것이란 걸 알긴 알까요.


 앞으로 어느 배를 가던, RSA에 입항하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경우, 절대로 그 선식 회사는 이용하지 말라고 도시락 싸 들고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글로 적다 보니 다시 부아가 치미네요. 어휴. -_-;;


 본선은 오전까지 바로 데크 위로 치고 올라오는 파도에 주눅 들어 선속 4.5노트(!)라는 기록적인 거북이걸음을 기록하고 이제 좀 정신(?)을 차려가는 중입니다. 선교에서 당직을 서다가 바로 홀드까지 치고 올라오는 파도에 ‘아이고 내 소화전 날아가면 어쩌나?’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턴버클로 묶어 둔 GRAB이 쓸려갈까 하는 고민으로 바뀌더군요. 


 홀드 가득 채운 콩들이 대미지 먹을까 그것도 고민이 되었지만 안전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답니다. ^^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식구들과 늘 저를 돌 봐주시는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과 주님께 의탁했기 때문이죠. ^^ 그 힘으로 하루하루 달려갑니다. 


 오늘은 죄다 투덜거리는 글줄로 메일을 채워버렸네요. T_T 다음 메일에는 좀 즐거운 길로 찾아뵙겠습니다. 


2011년 8월 18일, 모리셔스 방향으로 북동 진중인 CS D호에서, 둘째였습니다.

 사진:남아공 더반에 입항하는 CS A호 - 외해에서 파도가 쳐 올라 갑판 위에 묶어 놓은 GRAB이 흔들려 떨어져 나갈까 봐 걱정했다던 동형의 자매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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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에게


 네 편지를 받아 한 자 한 자 읽어 가다 보니, 어쩌면 커다란 파도에 노출된 너의 배 갑판에 나 홀로 팽개쳐져 언제 쳐 오를지 모르는 '꽝'하는 소리와 함께 휘둘리는 파도에 휩쓸릴 듯 한 공포가 으쓱하니 다가오는 느낌이 드는구나.


 그러나 그건 네가 받은 충격에 비해서는 별로 커 보이지 않은 형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바닥 선상생활을 시작하여 하나씩 배워가야 하는 마당에 너무나 얍삽한 맘으로 사업하는 사람을 대면하며 느낀 너의 그 큰 실망과 배반감이 앞으로 너의 생활에 큰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너의 그 편지 이야기를 오픈하기로 한다. 


 사실 누구라고 이야기해 놓은 걸 보면서, 알 만한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를, 금세 눈치챌 수 있는 형편을 네 편지는 가지고 있었기에 만약에 그 내용이 너의 일방적인 느낌이나 선입견이 가미된 잘못된 이야기라도 된다면, 그건 입쌀에 오른 어떤 사람의 인격에 크나큰 오점을 찍어주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기에 처음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이 곳에다 이야기를 풀어 감이 조금 부담스러워 더 익명성을 부여토록 작은 고치기는 했다. 


 하나 너의 안목을 믿어주며 읽어가다 보니, 그런 염치가 없는 방법으로 사업하면서 우리들 선원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당사자라는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렇다면 그냥 만천하에 밝혀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우리들과 인연을 맺는 것은 끊어 주기로 작정, 최종적으로 이 글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배를 타다 보면 육상(회사)에서 뒷바라지가 유연하게 진행되지 못하든가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에서 선원들이 내팽개쳐지는 일도 종종 발생하고 있더구나. 이런 난감한 경우를 당해 당황하고 있을 때 그 뒤를 돌보아 주는 일로 선원들에게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이들 선식 업자가 있단다.


그들이 그런 숨은 일을 행하여 선원들에게 고마운 도움을 주는 것을 긴 안목으로 본다면, 자신들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선원들로서는 고맙기는 하지만 구태여 미안 해할 이유까지는 없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얽힌 인연은 결국 회사 와도 가까운 유대를 맺게 하며, 타자매선들에게 회사를 통한 지원사항이 현지에서 발생했을 때, 회사는 제일 먼저 그 선식 회사를 파트너로 지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 하의 거래라고 해도 최종 결말은 뭐니 뭐니 해도 본선에서 끝나는 것이므로 선식 업자는 본선에서 최소한 불평불만이 없는 공정한 거래로 끝마침을 해줘야 할 것인데, 개중에는 회사와의 유대관계만 돈독히 살리고 본선에 대해서는 어딘가 모르게 섭섭하고 등한히 여기는 느낌을 갖게 일을 처리하여 우리 선원들의 눈 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묵묵히 자신들의 하는 일에 전념하며 생활하는 선원들이 먹을거리와 작은 기호품을 수급받는 과정에서 별로 인간적이지 않게 취급받고 대우받는 일을 당한다는 것은 그냥 참고 넘기기에는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드는 일이다.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해서 사업을 한다 해도 힘든 세상인데 그렇게 얄팍한 술수로 자신의 손해를 선원들에게 떠 넘기는 비열하고 악착스러운 상술은 이제 이 바닥에서 쫓겨나야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한국사람이고 더 줄여 같은 동문이란 학연까지 공유한대도 말이다.


 이제 파도가 쳐 올라오는 갑판을 보며 네가 관리하고 있는 물품들이 파도에 휩쓸리는 걸 걱정하거나 혹시 선창 내로 해수나 하여간 수분이 침입하지는 않을까? 를 걱정하는 너의 모습에서 점점 자리 잡혀가는 진정한 항해사의 모습을 찾아내며 흐뭇한 마음을 가져 본다. 


 항상 맡은 바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며 <건강한 몸 건전한 마음의 너>이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잊지 않고 있다. 네 형한테서도 편지가 같이 갈 것이다.

 이번 봄 마당 가에 심어주어 활짝 피었던 <하늘매발톱 꽃>의 모습이다. 푸른색이 도는 종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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