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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pr 06. 2019

파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네요.

아버지 보세요. 2011.08.16


 우현 쪽으로 신나게 두드리는 높은 물결에 정신줄이 쏙 빠지고 있는데 저희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어느 배가 VHF로 불러옵니다. 


M/V LOWLANDS SUNRISE. 배 이름이 참 맘에 드네요. 300미터 가까이 되는 길이의 CAPESIZE의 벌 커인데 라스팔마스로 향하고 있답니다. 

강풍에 안테나가 상했는지 기상도와 항행경보 하나도 받지 못했다며 기상정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할 그 친구들과 우리의 경로가 사뭇 다르기는 하지만 AWT(*주 1)로부터 받은 내용으로 대충 케이프 타운까지의 기상상황을 숙달되지 못한 영어지만 열심히 설명해줬습니다. 


 너희는 덩치가 커서 그다지 걱정되진 않겠다고 위로를 해줬는데 정말 LOWLAND에서 만든 배인지 열심히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며 볼멘소리를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서로의 안전항해를 기원하면서 무전을 마쳤죠. 

BON VOYAGE!  언제 들어도 참 멋진 말 같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바다는 ‘조용한 바다 인도양’ 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AWT 메시지에 따르면 저희가 달려가는 코스로 19일까지 GALE FORCE WARNING이라고 하니 당분간은 이렇게 시끄러운 인도양을 달려갈 듯싶네요. 


선속도 덩달아서 떨어져서 10노트 주변을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긴 항해에 세월 보낸다는 말이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 듯싶습니다. 뭐 날씨만 좋고 세월 보내게 되면 그게 더 좋겠지만요. 


배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려갈 때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갈 때의 차이를 아버지는 잘 알고 계시잖아요? ^^ 

오늘도 선내 시간을 한 시간 전진시켰습니다. 지난번 인도에서 출발해서 브라질까지 달려가면서 8시간 30분을 후진했는데 이번 브라질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는 11시간(!)을 전진하게 되죠. 적금을 들었다가 이자까지 다 챙겨서 받아먹는 기분입니다. 


 지난번 브라질로 향할 때 함께 당직을 섰던 실항사는 브라질 출항하면서부터 일 항 사 당직 시간으로 근무시간이 바뀌는 바람에 부실 은행에 돈 맡겼다가 원금도 못 받는 처지 같이 되었다며 인상을 쓰더군요. 


뭐 그런 것이 다 뱃사람 팔자 아니겠냐? 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고 올 10월에 1년을 채우고 하선할 마당에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셈 치라고 등 두들겨줬죠. 


 공연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저만 덕을 본 것 같아 미안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 전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 후진 때와 달리 당직이 끝나고 나서도 잠이 안 와서 멍하게 시간 보내다 새벽녘에나 잠들곤 한다는 것입니다. 후진 때는 지쳐서 눕자마자 꿈나라행이었는데 전진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인 듯싶네요. ^^ 하여간 주야장천 서쪽으로만 달리는 배만 타다가 동쪽으로 가는 배를 타보니 이런 좋은 점이 있긴 있네요. ㅎㅎ


 광복절이었지만 항해사 일과는 변함없이 그렇듯 그냥저냥 보냈습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광복절(?)이 17일이라고 하던데,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이즈음이 '광복'인 것을 보면 그들의 업이 크긴 큰 모양입니다. 


 남의 나라 광복에 지들은 국치에 지진 난리로 여전히 속을 썩고 있으니... 배 타고 들어갈 때는 참 좋은 나라인 것 같은데... 앞으로는 그런 아픔을 주지도 말고 받지도 않는 그런 착한 나라가 되어 주었으면 바라봅니다. ^^


 배는 씩씩하게 풍랑을 잘 해쳐가고 있습니다. 우리 식구들도 이처럼 씩씩하게 늘 건강하고 화목했으면 합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막내..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와 건강이 함께 하길 빌면서. 다시 메일 보낼게요. ^^ 아자아자 아자~!!!


 2011년 8월 15일(여기는 아직 광복절입니다. ^^),

마다가스카르로 접근 중인 CS DAISY호에서, 둘째 올림.


 *주 1 AWT: WEATHER AND ROUTING COMPANY의 한 회사. 선박에 기상상황과 침로 과정 등을 선박에 추천하여 주는 일로 사업을 하는 회사.

브리지 내부 모습

  

우현 윙 브리지에서 후미 쪽을 향한 바다에 그야말로 축복된 날로 여겨지는 황혼이 찾아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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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에게


 그래 그렇게 대양의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타선박과 통화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정보도 전해주며 좀은 으쓱해질 수도 있는 작은 기쁨의 순간을 너도 경험했구나.


80년대 초 바로 지금 네가 달리고 있든 그 인도양 한가운데서 나도 겪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지.


그때 우리 배는 시야가 아주 심하게 제한된 짙은 안갯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신조선 측에 들었으므로 모든 항해계기를 충분히 활용하며 항해 중이었기에 레이더에 나타난 타선박의 동향을 예의 주시한 후 그 배를 불러서 그 배의 형편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을 알려주며 우리와의 상대 피항동작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알려줬던 적이 있었단다.


 당시 그 배는 나이가 많은 중고선으로서 벌써 며칠째 나빠진 기상으로 인해 제대로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단지 추측항법에 의존하며 그곳에 도착한 상황으로 우리와 서로 엇갈려 지나가는 위험한 컨디션 속에서 느닷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전화 앞에 나섰던 것이었지.


 그러니 우선 급한 대로 우리 배와 안전하게 지나치도록 요청한 우리 의도대로 따라주고 난 후, 이제 안전하게 지나 친 것을 확인하며 헤어질 인사를 하려는 우리에게 말을 멈추게 한 후,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 달라는 위치 구걸을 하여 왔었단다. 


 어쩌면 같은 항해사로서 타선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듯한 기분을 감수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으려는 그 심정은 그냥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함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모든 창피함(?)을 감수하며 선박 안전을 위해 물어 온 그 배의 판단을 모르지 않기에, 나는 될수록 우쭐하려는 기분을 감추도록 노력하며 우리 배의 위치를 낸 후 그곳에서 레이더에 나타난 그 배와의 거리와 방위를 가지고 경위도를 산출하여 알려주었었지.


 어둠 속을 헤매든 장애인이 예상한 위치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한 문고리를 잡으려 노력 중이다가 드디어 찾아낸 목표물에 대한 감지로 일시에 고민이 해결된 기분이 이만했을까? 


그 배가 며칠째 꿍꿍 앓고 있던 속내에서 벗어나 환호성을 감추지 못하고 즐거워했으리라 짐작하며 BON VOYAGE를 외처나누며 헤어졌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서로의 그림자조차도 확인 못한 어둠 속의 행사였었지.


 사실은 당시 역지사지의 경우로 타선에게 우리 배의 위치를 구걸하였던 기억을 나 역시도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며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고 생각되는구나. 이렇듯이 행사한 일들로 바다 위에서의 인연은 하나씩 역사를 보태어 가는 것이란다.


 선박의 동, 서진에 따라 선내 시간의 전, 후진을 3 항사 당직 시간에 해치우는 우리나라 선원들의 선내 당직 관습 하에서는, 더욱이 그 시간대부터 실습을 시작하는 실습생-실 항기사-입장에선 교육 형편 따라 다른 직책인 1,2항 기사 시간대로 실습시간이 옮겨질 때는 이미 시행했던 시간의 전후진에 따라 당직시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든 현상은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것이란다.


 현재 서구의 선박 중에선 이 시간의 전 후진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식으로 실시하면 한 직책(3항 기사)에 너무 많은 중압감이 실린다고 해서, 한 시간의 전 후진이 필요하면 각각 20분씩 쪼개어서 모든 당직사관 시간대에 골고루 나누어 근무하는 방식도 택하고 있단다.


 계속되는 황천 항해에 심신이 좀 피로해졌더라도 그에 밀리지 말고 열심히 맡은 바의 책임 완수에 최선을 다 해주길 바란다. 


 군대에서 불침번이 교육받는 내용-나 한 사람의 철저한 당직 이행이 우리 국민 모두의 단잠을 이루게 한다-과 같이 너의 철저한 근무태도가 거기에서 비롯될 모든 상황의 시발점임을 잊지 말거라.


네가 사랑하는 집안 식구들 모두는, 이 여름 비에 젖은 축축한 무더위 속에서도 열심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단지 마당가의 목련 나무에서 철(?) 잃은 매미들인 참매미, 쓰르라미. 말매미들이 모두 함께 나타나 목청을 높이는 좀 독특한 경험을 이야기 안 할 수가 없구나.


 그동안에는 이들 매미의 출현으로 여름의 시작(참매미)에서 여름이 깊어가고(쓰르라미) 이제 그늘 밑이 서늘해지는 여름의 끝자락(말매미)이 왔음을 알게 하는 거로 계절의 순리를 셈하고 있었는데, 금년에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비로 인해 계절감각을 상실한 이들 매미들이 한테 어울리듯 나타나서 조금이라도 방긋하는 날씨가 되면 저 마다 소리를 내고 있으니, 불협화음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너무나 닮은 것 같구나. 


이 아침 지금 이 시간, 그간의 우중충했던 구름을 젖히며 반가운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아마도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간의 날씨에 반대급부로 부딪치던 감성은 무더위가 남아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환한 웃음 띤 마음으로 해님의 출현을 반가워하고 있다.


자 오늘 하루도 즐겁고 보람찬 하루이기를 기원하며 소식 전함 여기까지 하겠다. 

 사진은 우리 집에서 키운 꽃과 오이로 꽃 비빔밥을 만들려고 준비한 모습이다. 둘째 너도 먹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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