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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y 04. 2019

안트워프에서 로테르담으로 행선지가 바뀌었어요

대양 항해만이 가장 좋은 휴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중입니다.    2012.09.15


 이미 네 번의 항구를 거치는 동안 앵커링 없이 바로 접안하고 바로 이안하는 벌크 경기가 바닥이라는 상황에 걸맞지 않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본선의 모든 선원들이 파김치가 되었었는데 이제 닷새째 접어드는 항해로 다들 기운을 차려가는 모습을 보이니 한결 즐겁습니다. 


 모처럼 날씨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던 지난 항차에 비해 이번 유럽행은 오늘까지 좋은 기상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한몫을 하고 있지요. ^^ 


 이번 로테르담 입항 역시, 대리점을 통해 받은 정보에 따르면 22일 접안, 24일 이안이라는 갑갑한 소식이지만 PARIS MOU PSC를 영국에서 무사히 수검한 상태라 그래도 맘 편히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기회는 될 듯하여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원들이 위안을 삼고 있는 중이죠. 


 지난번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죄다 이틀 안에 모든 작업을 마치는 살인적인 스케줄에 수속과 PSC에 들볶이느라 요즘은 오히려 항구보다 바다가 더 편하고 안락한 느낌입니다. 


제가 승선하기 전까지는 한 달씩 웨이팅도 자주 했다던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ㅠ.ㅜ


 지난 5월, 저와 일기사, 갑판장, 삼 기사 승선 이후로 완전히 뒤집어진 본선 스케줄에 스스로 쇠 덕이 없는 것인지 의심도 해보았습니다만, 해가 뜨면 질 때도 있고 져버린 해도 다시 떠오르는 법이니 이런 바쁜 나날들이 있으면 다시 좀 쉬엄쉬엄 할 수 있는 날도 오겠죠, 뭐.


 날씨는 좋은 날씨를 받으며 달리고 있지만 선속은 정말 '기어간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안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선장님은 고민하실 만도 하지만 오히려 '안 나가는 속도를 내가 어쩌랴?' 하며 이 참에 쉬엄쉬엄 가자고 독려하시니 다들 맘 편하게 지내는 중이죠. 


 대양 한 복판인데도 TIDE라고 표현할 정도로 밤낮으로 바뀌는 엄청난 CURRENT에 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만 배는 굳건하고 든든하게 제 갈 길 잘 가고 있으니 그려려니 합니다.


 아참, 원래 벨기에의 안트워프로 가기로 했던 예정이 출항하고 바뀌어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바로 옆 나라라서 차트를 대폭 뒤집어버리는 짜증스러운 항정의 대수술은 없었지만 출항하고 이틀 만에 목적지를 바꿔버리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용선주에게 좀 짜증은 나더라고요. 


 어쨌든 돈 내는 놈이 주인이니 우리야 따라갈 수밖에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따끔하게 한 마디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정말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차항은 결정되지 않아서 다들 이번에는 좀 맘 편한 곳으로 가길 바라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지만 이미 파나마 운하를 넘으면서 유럽/미주 항로에 어느 정도는 머물 각오를 했으니 좀 맘 편히 다닐 수 있도록 계속 날씨라도 좋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PSC도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잘 마쳤으니 뭐 그다지 걱정되지 않고요.


 서울은 어느새 가을로 접어들고 있겠네요. 


듣자 하니 추석 전후로 웬 흉측한 태풍이 또 접근한다는 소식이던데 모쪼록 살짝궁 비켜가서 모두가 즐거운 한가위를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다시 메일 드릴게요. ^^


 2012년 9월 15일,

우리 가족의 화목과 건강을 기도하며,

북대서양에서 둘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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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 항해의 묘미를 즐기고 있다니 마음 놓이는구나. 2012.09.16




 요새 매일 새벽 6시의 미사에 네 엄마와 같이 참여함은 제일 먼저 너의 무사한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오늘 너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미 그런 우리 가족의 염원이 제대로 하느님의 뜻이 되시어 너에게 전해진 모양이라고 믿어지는구나.


 사실 대양 횡단에서 갖게 되는 마음씨 중의 제일은 대양 항해가 선원들의 휴식을 갖는 좋은 시간이란 걸 몸으로 느끼어 마음으로 즐기는 상황이란다.


 대양에서 흐르는 해류의 물길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지만, 그런 어려움을 순항 과정에서 배가 나타내 보이는 점을 잊지 말고 타이드 차트(각 해양 별, 월별로 만들어진 대양의 해류 표시 차트)와 비교해 보며 대양에서의 해류의 흐름을 열심히 관찰해둠도 앞으로 너의 관록에 꼭 필요한 일의 하나임을 알려둔다.


 안트워프라면 내륙에 캔널로 연결된 항구로 펜더가 없는 부두에 접안했던 80년대 초의 옛 기억부터 떠 오르는 곳이지. 


 당시 상륙을 하여 어떤 술집에 들려보려 했을 때 문지기로 있던 녀석들이 우리를 인종 차별하는 태도로 출입을 막던 일도 있었던 동네라 나의 기억으론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곳이었단다.


-물론 그 후 달라졌겠지만- 이번 너의 기항 후 그런저런 상황을 물어보려 했는데 기항 취소되었다니 그만 어그러진 생각이 되었구나. 


 로테르담 항구는 유로포트를 통과하여 좀 더 안쪽에 있는 항구로, 그곳이라면 시내 구경을 할만한 곳이지만 나도 겨우 한번밖에 못 가 봤단다. 


사실 그 후의 로테르담행 석탄과 철광석이라며 실었던 여러 번의 기항은 유로포트에 접안한 후 빠르게 진행되는 하역 작업으로 인해 매번 나가 볼 기회는 가져 보질 못했었고...


 용선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며 행선지의 변경 요청을 듣고 싶었던 건 승선중 나도 마찬가지였단다. 더구나 변경된 일로서 본선에 끼쳐지는 막대한 일거리가 생겼을 때 갖게 되는 그 야속함이나 괘씸함, 그리고 약자가 갖는 서글픔 등을 생각하면... 어 휴~ 그러나 그게 용선계약서에 서명이 되는 순간 갑과 을로 갈라진 운명에서 을의 책임하에 있는 본선에서는 어쩌면 거의 영원히 기대하기 힘든 대우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긴 해도 말로서 그들에게 항의하고 내 속내를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여태껏 생활한 것은 너와 마찬가지로구나. 


 사실 아주 좋은 해운 경기로 인해 배 빌리기가 하늘에 별따기 같은 세월을 맞게 되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곰살궂게 우리를 대하며 최대의 협조를 구하기 위한 작전도 썼던 기억이 몇 번은 있었던 걸로 기억할 수가 있구나.


 이번 추석을 맞이하기 전에 금년 따라 특히나 유난을 떠는 태풍들의 내습으로 이미 두 번이나 당했고, 17 일쯤 다시 우리나라를 정통으로 찾아올 것이라 예보되는 태풍을 두고 착잡한 마음이 들지만 결코 겁나거나 떨리지는 않는구나.


 사실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태풍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경우, 그  '도 아니면 모'가 될 수 있는 극한 상황 하의 공포를 이기고 헤쳐 나가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쳐 놓고 기다리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태풍 내습이 주는 내 생활의 변화나 공포감은 너무나 미미한 것이 아니겠니?


 하여간 바다 위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은 미리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는 판단에 주저하지 말고 따르는 결단을 내려야 함을 이야기해두고 싶구나. 


그토록 심사숙고는 꼭 필요하나 결행을 방해하여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못하고 일이 끝나는 것은 잘 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니까... 


 이제 두 주일 정도 남은 추석. 


배 안이지만 나름대로 잘 지내 주길 바라며, 집에서도 모두 너를 기억하면서 기쁜 추석 지낼 것을 약속한다. 


항상 건강하여라. 그리고 안전 항해를 친구 삼아 살아가는 선상생활을 이루도록 하자꾸나.


 집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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