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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y 16. 2019

선상투표를 하였습니다

사진: 미시시피강을 순항하는 CK ANGIE호에서 찍었던 풍경.

Photo by skyraider


 현재 본선은 제대로 맞붙게 된 겨울 북대서양(WNA)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부대끼면서 베네수엘라를 향해 남서진 중에 있습니다. 지금 형편은 앞에서부터 순간 속도 55노트의 바람이 불고 있으니 선교의 문을 여는 것도 겁날 지경이죠. 


 겨울철 북대서양과 북태평양은 모두 악명이 드높지만 WNA(WINTER NORTH ATLANTIC)라는 프림솔 마크(PLIMSOLL MARK, 재화, 만재흘수선 표지)가 따로 존재하는 겨울 북대서양이야말로 까칠한 바다의 진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엊그제 비스케이만을 지나면서 시작된 이 무지막지한 바람으로 다들 피곤에 절어 좀비 꼴이 되어가고 있는데 공선 항해이기에 몸으로 느끼는 피곤함이 더한 듯합니다. 


 짐이나 가득 실은 상태였다면 이렇게 가볍게 통통 튀는 롤링은 하지 않을 텐데 4번 홀드를 발라스트로 가득 채운 HEAVY BALLAST상태라곤 해도 덩치에 맞지 않게 이리저리 뒤틀리는 느낌은 언제 만나도 불쾌하고 힘이 드네요. 


 AWT를 통해 받은 기상 메시지에 따르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한 SWELL에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니 선장님을 비롯해서 다들 변침도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 


 선속도 어제의 반토막으로 기어가는 중이라 차라리 변침해서 다들 몸이나 추스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체념뿐이죠. 이래저래 몸도 마음도 악천후에 너덜너덜 변해가는 기분입니다.

사진: 부재자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작성했던 부재자 신고서


  그래도 어제, 본선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되는 '선상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기표소도 설치하고 참관인까지도 세워주면서 말입니다...


 승선 생활이 수십 년에 접어드는 베테랑 직장들도 배 위에서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현실에 상전벽해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세상이 좋아지기는 좋아졌죠. ^^


덕분에 저는 당직 시간을 넘겨가며 기표용지를 선관위로 위성 전송하고 뒷정리를 해야 했지만 늘 제삼자, 주변인으로 머물던 뱃사람들이 당당하게 주권을 행사하게 된 현실이 실로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다들 투표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포즈도 취해주는군요...

이런 현실이 아버지께도 새삼 감개가 무량하게 다가오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13일부터 여론조사 결과도 공포되지 않는 '깜깜이 시간'이 시작될 고국과 달리 선상 부재자투표는 

오늘,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이 메일이 도착할 때쯤이면 마무리될 듯하네요.


  어제 용선주에게 날아온 메일로 배 안에는 또 이런저런 감정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현재 베네수엘라 PUERTO ORDAZ에서 짐을 싣고자 하는 배들이 VERY LONG TIME WAITING에 걸려있다는 소식이었죠. 심할 경우 석 달 정도의 웨이팅도 예상된다는 소식에 기관부는 조수기(청수 제조기)를 FULL로 돌리고 사주부는 이제 한 달치 빠듯하게 남은 부식에 근심이 늘어가게 되었죠. 


 본선 실항사는 다음 달 9일에 1년간의 실습을 마치게 되는데 선장님은 만약에 웨이팅이 길어지게 되면 베네수엘라에서 연가 하선할 이들을 교대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지난 5월 승선한 이들이 그 대상이 되는데 교육이 겹친 저 역시 만약 웨이팅이 늘어질 경우 이곳에서 실항사와 다른 교대자들을 이끌고 내리게 될 듯싶습니다.


원래는 다이렉트 접/이안을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하선할 계획이었는데 서브 차터러의 계획이 또 달라진

모양이네요. -_-;; 


뭐 어디서 교대하든 상관은 없는데 장시간 비행기 여행이 지겨워진 터라 살짝 근심이 생기긴 합니다.


 하여간 요즘 제 근황이 이렇습니다. 하도 메일을 안 보냈더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날씨 좋아지면 조금 더 길게 메일을 띄울게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소식도....^^


2012년 12월 14일,

북대서양의 진상 날씨에 고생 중인 CK ANGIE호에서,

가족들의 건강과 화목을 기원하는 둘째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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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에게 


시즌이 겨울 시작을 했으니 결국 빗겨 가질 못하고 파도를 만나고 있었구나.ㅉ ㅉ


 짜증이 나고 어떤 때는 무섭기도 하고 하여간 흔들어 대는 삶의 발판이 바람과 파도에 여지없이 우롱당하는 황천의 환경 속에서도, 파도에 묻혔던 배가 다시 수면 위로 솟아 올라 물기를 툴툴 털어내며 자세를 잡아 줄 때, 우리들 뱃사람은 그런 배와 함께 다시 마음을 다잡아가며 그 파도와 바람이 지나가고 어느새 좋은 시간이 올 것을 믿고 기대하며 황천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사람인 것이다.


 이제 중부의 대서양에 접근하면서, 그 악명에 지레 겁을 먹어가며 꺼려지는 마음을 품고  대하든 말든 아차피 시간은 북대서양의 겨울철 맹위에서 점점 벗어나게 될 터이니, 며칠만 더 참고 기다려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한다.


 세상만사의 굴곡의 묘미는 요(凹)가 깊어지면 철(凸)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순리이니, 네가 크게 부대끼며 북대서양을 만났으니 적어도 그만큼에 비견되는 편안함 역시 너와 너의 배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나의 경험으로도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음이 내 기쁨이기도 하다. 파이팅!!!


 더구나  항해 중인 외항선 선상에서 투표에 참여하여 국민의 기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세월이 되었음을 너의 소식 전함 속에서 받아 들으며 그야말로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을 감출 길이 없구나.


 그러고 보니 1963년 해양대학 3학년 재학 중에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뽑는 투표권을 행사하며 대선 투표에 참여를 시작했으나 그 후의 대선에서는 거의 모두 승선 중인 때에 선거를 만나 그야말로 한 표의 행사를 치르지 못하는 세월을 보내었던 셈이지.


 이미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먼 나라에 기항하며 뉴스로 전해 들어오면서 왜 나의 한 표는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지나야 했는가? 에 섭섭한 마음을 가지면서 지금의 부재자 투표 같은 방법을 도입하여 우리들에게도 국민으로 서의 참여 기회를 공평히 주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우리들끼리 말로도 해봤었지.


 이제 그랬던 나의 생각이 내가 그곳을 떠난 다음인 지금에 사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그런 세상사에 실제로 참여 못한 서운함 또한 은근히 남는구나.


 대신 이번에는 오는 19일 우리 집 동네에서 직접 투표하며 참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직접선거에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이제 날씨도 파도도 화창 해지며 잦아들기 시작하는 시간이 찾아와 주었기를 믿으며 너의 건투를 빈다.


할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네 형과 동생 모두 너의 건강한 귀향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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