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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y 24. 2019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 묘박지에서

그저 꿈으로 꿀만한 상황인 셈이죠.



 요즘 가뜩이나 부실하게 올라온 부식들로 모두들 입맛만 다시는 일이 잦아지면서 다들 집에 마련되어 있을 김장김치에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교는 종종 김치에 관련된 이야기 꽃으로 만발합니다.


  선장님부터 실항사, 저까지 아까는 김장을 담그는 중에 만나게 되는 김치 속과 절인 배추, 그리고 삶은 돼지고기 이야기로 침만 꼴깍거리면서 집에 가면 기필코 먹으리라고 다들 다짐하는 시간도 펼쳐졌었죠.


  뭐 대단한 음식이나 산해진미가 아니라 우리가 땅에서는 늘 만나던 '김치'라는 것에서 다짐까지 하게 되는 것을 보면 정말 뱃사람들이 꿈꾸는 일은 사소한 것들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칠레산 홍어회 이야기도 잠깐 나왔었는데 아무래도 자주 먹는 동네가 따로 있다 보니 그것보다는 돼지수육과 김치 속 이야기에 다들 이성이 마비되더라고요.

(아 물론 홍어도 이번에 집에 가면 삼합으로 흡입해주리라고 작정하긴 했습니다만...^^)


  오리노코 강에 앵커를 박은지 지금 메일을 쓰고 있는 오늘로 40일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까 삼 기사와 잠깐 이야기를 해보니 청수도 이제 200 여톤 정도 남아서 이번 달 중순께부터는 절수를 해야겠다고 슬그머니 걱정을 하더군요. 


   워낙 물을 적게 쓰는 배다 보니 하루에 4톤에서 4,5톤 정도 물을 사용하고 절수를 해도 많이 줄어야 0.5에서 1톤 정도밖에 줄어들지 않겠지만 애초 전혀 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가 하염없이 늦어지는 접안 일정에 물 걱정까지 시작하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앵커 박고 신선놀음한다고 좋아라 했던 갑판장님도 '요즘은 하릴없이 멍해져서 이러다 병들겠다'라고 연가 신청서를 언제쯤 내면 되냐고 물어오더군요.


  그동안 2012년 하반기 정기선 용품 신청과 2013년 상반기 선용품 신청을 보낸 바 있지만 그간 극동지역으로 가지 못하다 보니 두 번의 선용품 신청에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고, 그나마 있던 페인트도 이번 앵커링 중에 여기저기 도색을 하고 나니 똑 떨어져서 정말 갑판부에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며 벌어진 일들입니다.


  노후선이면 '깡깡이'란 고정된 작업이라도 있지만 신조선이라 그것도 필요 없고, 전구가 나가도 스페어가 없으며, 페인트 칠을 하려 해도 페인트가 없는 이런 상황이 '오래간만에 좀 쉬겠다'며 안도했던 사람들마저 '어서 집에나 가야겠다'는 상태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항해 사관들도 애로사항은 마찬가지인데, 그동안 밀려있던 서류 작업도 마무리하고 올해부터 발효되는 해사 노동협약(MLC) 관련 자료들도 죄다 마무리했지만, 각종 출판물과 NOTICE TO MARINERS가 지난 두 달간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싱가포르에 가는 날(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죠. -_-;;)까지 들어올 길이 없어서 멍하고 있다가 중국 기항을 열흘 앞에 두고 일 폭탄 맞을 일만 남았다는 두려움이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곳 대리점에게 문의하니 합쳐서 700달러면 충분할 이것들을 4000달러를 부르는 배짱을 보여주는군요. 그것도 '접안 후'에나 가져다준다는 단서까지....-_-;; 


차라리 싱가포르에서 두들겨 맞을 한이 있어도 이런 양아치들 배를 불려줄 수는 없다고 분개한 상황까지 이어지는 중입니다.


  기관 사관(본선은 기관 무인화 선박이라 기관부는 데이 워크에만 임하고 당직은 선교에서 우리가 대신 서줍니다)들도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라 주기부터 발전기까지 죄다 오버홀까지 해놓고 요즘은 낮 세 시면 데이 워크도 접고 갑판부 일하는 곳에서 이것저것 도와준다고 나서는 판이죠. 정말 승선하고 이런 상황은 처음입니다.


  주변에 있는 다른 배들의 상황은 우리보다 좀 더 심한 모양인데(다들 우리보다 길게는 한 달에서 짧게는 열흘 정도 먼저와 있던 친구들이거든요) 청수가 다 떨어졌지만 청수 보급이 안돼서 강물을 퍼올려서 침전시켜 쓴다는 얘기까지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VHF 채널 16번으로 나와 노래 틀고 노래를 불러대는 놈들 보면 짜증 나서 '저것들은 항해사 자격이 없는 쓰레기'라고 매도하곤 했는데 요즘에는 '할 일이 없으니 저렇게라도 놀아야지'라고 유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영하 30도를 오르락거리는 캐나다에 입항한 사선대 선박(C.HARMONY호)이 데크가 온통 얼어붙어서 홀드가 열리지 않는 통에 출항정지 얻어 맞고 그 추위 속에서 스팀 차를 불러 파이프란 파이프는 죄다 녹이는 생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그래도 우리가 그 친구들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속 없는 동기 녀석들이 '오 형! 베네수엘라에서 꿀 빨고 있다면서?'라고 날아오는 메일은 보는 일은 정말.... 웃어 넘기기도 곤란하더라고요.


  하여간... 있는 일 없던 일.. 죄다 만들어서 해버리고 선내 문고에 있던 책들에 돌아다니는 하드디스크에 있는 다큐멘터리까지 모조리 섭렵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몸이 편한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앞으로도 한 달은 더 있지 않을까 싶다'식으로 날아오는 대리점의 메일에도 다들 좌절하며 차라리 쉬프팅이라도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드네요. -_-;;


  오늘 아침에 옆에 있던 배 하나는 기어이 '3마일' 안쪽으로 옮겨갔는데 그쪽 캡틴 말이 '엔진 테스트를 위해서'라는 것은 핑계고 실은 뭐라도 좀 해야 해서였다고 하더라고요. -_-;;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봅니다. ^^


  배에 걸려있는 달력이 죄다 영국 달력이라 우리나라 설이 언제부터인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

하여간 다가오는 새해 준비 잘하시고 새해에도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기원해봅니다. 

새해 되면 통화 한 번 또 하시죠. 헤헤...^^


 2013년 2월 5일,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 앵커리지에서,

둘째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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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가 없어 뵈는 해운 불황의 여파가 모두 베네수엘라로 몰려 간 건 아니련만...     2013.02.09


 그곳에 기항하고 있는 배들이 모든 불황의 여파를 같이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으로 보이게 끔 네 메일은 절박해 보이는구나.


 그렇긴 해도 네가 건강하게 잘 있다는 상황만이 나한테는 제일 먼저 고마운 일로 받아들이게 되는구나.


어쨌거나 너의 형편을 곰곰이 살펴보며 어떻게 그 시간들을 보내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 일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장기간 정박으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선원들의 주부식과 청수 보유량이 충분히 그 기간을 견딜 수 있는가 하는 일이 첫째요. 아울러 배도 기름을 먹고사는 무생물이니 그 기름(연료유)을 충분히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 역시 문제이지.


 현재 너의 배에서 배의 연료유로 인한 문제는 크게 없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선원들을 위한 먹을 것과 마실 물에 대한 안타까운 상황은 벌써 슬슬 나타나는 상황임을 알겠구나.


 이런 악조건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 하는 선원들을 위해 그곳 베네수엘라의 선식 업자들은 자신들의 폭리를 취할 좋은 기회로만 반기는 모양새라 또 한 번 너희 선원들의 마음에 분노가 들어서게 함을 알겠구나.


 그런 걸 알면서도 어떻게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어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괜히 미안할 뿐이다.


 이 모든 것 결국 기다려주는 시간의 연장이 해결해 주는 일 일뿐이구나. 


좀 더 힘든 상황인 해적들에게 납치된 경우라 가정하며 비교한다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는 기다림이 지금의 순간들이니, 너그러이 생각하여 너무 조바심을 내지 않기를 바란다.


 같이 투묘하고 있던 어느 배가 3 마일 정도 투묘 지를 옮겼다는 이야기에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해 봤다.


SHORT NAVIGATION. 이란 단어와 SIGHTING ANCHOR라는 단어들을 말이다. 


 전자는 장기간 투묘 중 발묘하여 몇 시간을 전속으로 달려준 후 다시 투묘하는 것이고, 후자는 투묘 중 닻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한 번씩 닻을 걷어 올렸다가 다시 투묘해 주는 일이지.


 네 이야기의 그 움직였다는 배는 그 두 가지 중의 어느 일을 행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장기간 투묘 중 기관부의 메인 엔진이나 발전기 등을 오버올 정비작업 후 결과를 체크하기 위한 제3의 다른 이유로 그랬는지도 모르겠구나. 


-보통의 우리들은 장기간 정박 중에는 그런 기관 작업을 늘 해주는 편이니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장기간 한자리에 투묘하고 있게 되면 선체 외판에 생각지도 않게 많은 따개비나 조개류, 그리고 이끼 등의 수중 생물이 부착하여 선체 저항을 크게 하여 선속을 떨어 뜨릴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너희 배 정도 수준의 대기 중이라면 일주일에 서너 시간은 닻을 뽑아 전속으로 달려서 부착되려는 그런 생물들의 활착을 방지해야 하는 것이란다. 그런 작업을 SHORT NAVIGATION이라고 하는 거고,


 강의 하구 등 뻘이 많이 흘러내리는 곳에 장기간 투묘 중 일 때는 혹시 잘 박힌 닻 위에 더욱 돈독하니 뻘이 덮혀지어 원하는 순간에 닻을 걷어들이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는 거란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한 때에 닻을 뽑았다가 다시 내려주는 것을 SIGHTING ANCHOR라고 하는 거란다.


 그런데 만약 닻을 걷어 올렸는데 도저히 그 홀딩 파워가 윈드라스의 힘을 넘어선 상태-닻이 올라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면 어찌해야 될 것 같으냐?  잠깐 밑의 대답을 보지 말고 어떻게 할까 방법을 생각해 보거라.


 그 장소의 조석을 살펴 저조 시에 윈드라스 힘으로 끌어드릴 수 있는 최대의 양으로 감아 놓고 물때가 바뀌어 고조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가며 저절로 닻이 빠져나오는 순간을 찾아가는 당직으로 철저히 지켜봐야 하는 것이란다.


 윈드라스의 파워로는 안 될 정도로 아무리 깊게 뻘속에 묻힌 닻의 파주력이라도 본선의 부력은 절대로 이겨 낼 수 없기에 어느 순간 순순히 뽑혀 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지.


 그러니 뽑힌 후 즉시 배가 움직이는(끌리는) 것을 대비해 엔진도 준비한 채 기다리다가 닻 떠! 상태가 되면 즉시 나머지를 마저 감아주며 엔진 사용하여 다음 행동으로 돌입하면 되는 거지.


또 한 가지 배웠지? 


 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줄을 서서라도 운동기구 사용하는 운동에 남보다 뒤지지 않고 시행하도록 하거라.

SHORT NAVIGATION을 실시하던 배가 전타하여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던 모습


 그래 네가 달력에서 찾지 못한 설날이 바로 내일(10일) 임을 알려준다.


 한 20여 년 만에 찾아온 설날 추위지만 우리 가족 모두는 집에 모여 따뜻한 연탄이 온기를 지펴주는 마루에서 차례를 지내기로 하고 있다.  너의 참석은 네 이야기를 하면서 이지만 우선은 그걸로라도 만족해다오. 집에 온 너의 삼촌네들은 우리 집 물김치가 아주 시원하고 맛있다고 하는데 네가 올 때쯤 다시 담가 놓도록 엄마힌테 꼭 일러두겠다. 네 엄마가 내 말을 듣지 않고도 먼저 담글 것이라 생각되긴 하지만 말이다...  자! 건강하거라. 집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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