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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r 18. 2021

두리호에 오르다

스물여덟 살 두리의 마지막 항해  - 3

연돌의 칠도 살콤 벗겨져 가는 두리의 모습

훤넬(굴뚝)의 채색도 옛 선주가 칠해준 모습 그대로 있어 낯설어 보이는 두리호는 어둠 속 자신의 보급자리에 몰래 숨어 들은 커다란 들짐승 마냥 어두컴컴한 부두에 웅크린 모습으로 접안 해 있다. 여기서 작업이 끝나면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싱가포르를 거쳐 방글라데시의 치타공까지 가서 그 생애를 마감할 배라는 선입견이 반 이상의 화물(철광석)을 이미 베이룬에서 하역해주고 찾아온 그녀의 덩그러니 떠 오른 모습을 괜스레 안쓰럽게 보게 하는 모양이다.


추우니 차 안에 있으라는 대리 점원의 말을 고맙게 생각하며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차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잠을 깨니 출입국관리소에 다시 가야 한다며 서두른다. 양자강의 하구 가까운 상하이보다 좀 더 강 상류 쪽에 위치한 난통의 밤거리 도로는 어둠과 어울린 속에서 울퉁불퉁 튀어 오르는 동요야 싫었지만 길 폭은 넓어 보인다. 


마구잡이로 달리는 거친 매너의 운전자와 차의 허름한 모습에 불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냥 말없이 참아주며 찾아간 이민국 건물은 철저한 보안을 가진 정문 초소와 잠가 놓은 문으로 우리를 일단 정지시켰다가 맞이해준다. 열어준 정문을 지나 마당을 건너 본관 건물로 들어서니 사무실 안에 당직자로 근무하는 20대 초반의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나타난다. 


늦게 방문한 사람을 경계함인지 갑자기 비상 경계음이 발령되며 시끄럽지만, 그녀도 대리점원도 모두 무시하고 제 할일로 들어서는 태도라 나도 모르는 척 귀를 닫아 주었다. 요란한 소리가 제풀에 잦아들 무렵, 받아 든 여권과 선원수첩을 뒤적이며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챙기는 그녀를 창 너머 대기 석에서 들여다본다. 잠깐 잠들었던 몸이라 그런가 다시금 느껴지는 추위에 감기를 걱정하며 몸을 부산하게 움직여 헛체조를 시작한다. 

그러고도 한참이 더 지나 추위에 지쳐들 무렵 서류심사가 끝났는지 만들어 놓은 상륙증에 스탬프를 팍팍 찍더니 대리점원에게 건네준다. 이제 배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한 길로 나서서 부두를 향한다. 아까 되돌아왔던 길로 다시 되짚어가기 위해 급한 달리기가 또 시작되었다. 저 멀리 인도양에 있는 방글라데시까지 자신의 종착지로 인도해주려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나를 품어주기 위해 두리는 점잖게 후부에 있는 현문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다.


가파른 셈을 헤아리는 스텝을 밟아 위로 오르며 속으로 하나 둘 세어낸 셈의 끝은 마흔다섯(45) 계단이었다. 

먼저 탔던 배는 쉰셋인가 되는 계단이었다. 이렇게 일곱, 여덟 계단의 짧은 차이는 공선 상태에서 출입하려 할 때면 제법 애를 먹을 수도 있겠다고 떠오른 생각은 그냥 무시하기로 한다.

이 현문 사다리를 사용할 날도 기껏해야 서너 번 밖에 안 남았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는 식의 얄팍한 계산이 뒤따라 떠올랐기 때문이다. 


3월 27일의 밤. 나는 두리의 현문사다리를 올라 승선하며 이렇듯 인연의 끈을 꼭꼭 묶어 내었다.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에 밤새워 최후의 양하 작업을 하고 있는 두리의 모습

30도가 넘는 가파른 경사를 가진 현문 사다리를 타고 올라선 후부 현문에서 조명은 어둡지만 굉장히 넓어 보이는 후부 갑판의 공간을 만나면서 선입견은 바뀌어 꽤 괜찮은 배였구나! 하는 심사가 든다. 지금까지 내가 타 왔던 CAPE SIZE 배 중에서 이만큼 훤칠해 보일 만큼 넓은 후부 갑판을 가진 배로 기억되는 배는 없었다. 


현재의 처해 있는 상황이 이 배로서는 최악의 경우가 되겠지만 그래도 넓어 보이는 첫인상은 그런 모든 악조건들을 물리치고도 남을 만큼 신선한 감각으로 나를 만나준다. 맞이하는 선원들의 모습도 우리네와 비슷한 인상을 보이는 미얀마 선원이라 그 역시 두리 호의 인상에 호감도를 높여주는 일조를 하고 있다. 

앞으로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란 예감은 내일부터면 내 방이 될 선장실에서 전임의 선장을 만나면서부터 확신되었다. 

널따란 선미 갑판이 훤해 보이는 두리호

반갑게 맞아주는 선장은 10여 년 전 같은 배를 타다가 승진하여 다른 배로 갔던 구면의 후배 선장인 이선장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움에 감흥이 못내 따사롭다. 예전보다 좀더 원숙해지고 틀이 잡힌 이선장이 반갑게 맞이해주니 승진하여 떠나며 헤어졌던 일이 바로 얼마 전의 사실 같이 회고된다. 아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은 전연 못한 채 왔는데 그는 이미 내 이름을 듣고 주위 사람에게 나를 알려주며 기다리고 있던 중이란다. 


장기간의 투묘 대기와 힘들었던 운항으로 심신이 지쳐있어 내리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번 4월에 결혼 20주년을 맞아서 가족과 같이 지내고 싶어서 무리해서라도 내리려 했다는 하선사유의 사족을 들려 준다. 사실 나도 지난 2월에 결혼 40주년을 맞이하여 무언가 해보려는 마음에 회사가 원하는 승선을 미루고 있었지만, 이 선장 역시 이유까지도 나와 닮은 어쩔 수 없는 공통의 뱃사람이다.


반가운 해후의 옛이야기는 나중으로 돌리고 우선은 본선에서의 필요한 사항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들은 후 아직은 손님으로 하룻밤을 쉬기 위해 배정해 준 파이로트 방으로 간다. 밖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했던 이른 봄밤의 추위에 떨었던 몸도 피곤해 있었고, 시간도 어느새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혼자가 되니 집에 있었던 지난 몇 달 동안 듣지 못하고 있었던 선박의 심장(발전기)이 뛰는 작은 진동음이 반갑게 내 귀와 몸을 통해 다시 찾아와 준다.  


배를 내리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면서 내 한 생애를 같이 하였던 몸에 배인 환경이 그렇게 두리를 통해 찾아와 주었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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