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알리기,페인트 칠하기
사진 : 갑판상에 작은 타워 같이 만들어진 대 위에 설비된 360도 돌릴 수 있는 기다란 노즐을 통해 고압의 해수가 쏟아져 나오도록 되어 있는 방화장비다.
사진과 같이 짐을 모두 싣고 출항 지휘한 도선사가 헬기로 떠난 후 외해에 들어서면 해수 펌프를 돌려 갑판상에 시꺼멓게 보이는 화물의 찌꺼기-석탄-를 씻어 내리는 갑판청소 작업에 사용하기도 한다.
벌써 한 달쯤 전이 되었나?
D.S호에 승선하려고 광양을 찾아 본선에 올랐을 때 첫 인상은,
-배가 너무 녹이 많이 슬어 있구나! 이었다. 이어서,
-어디부터 정비를 시작해야 하나? 를 염두에 굴려 보며 내 방을 찾아 갔었다.
물론 그곳에서 하역이 끝나면 드라이 도킹을 하며 수리도 제법 할 거란 예정도 알고 있었다.
그간 선내에서만 움직이는 생활에 어느새 길들여지며, 모든 게 눈에 익어가니, 처음 생각은 많이 퇴색 되면서 슬그머니 낡은 배와 한 통속이 되어 버린 무심한 경지에 까지 도달한 형편 같다.
점심 식사 중에 문득 그런 사실이 되살려 지며, 계속 그렇게 안일하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기관장에게 청낙(선체의 녹을 두드려서 떨어내는 정비. 깡깡)작업을 해보지 않겠는가? 물어 보았다.
기꺼이 동의를 얻어 낸 후, 오후 과업 시간이 되어 깡깡(청낙 작업을 소리를 빗댄 의태어로 그렇게 부른다.)을 할 작업복 차림새로 나섰는데, 기관장은 이미 갑판에 나가서 WASHING GUN의 꼭대기의 둥근 핸드 레일의 녹을 한창 두드리고 있다.
워낙에 많은 녹에 덮여서 제 두께보다 배 이상 두터워진 그 핸드 레일들은 두드리고 나니 마치 철사 줄 마냥 가늘어 보일 정도로 지름이 줄어 든 형상을 보여준다.
그래도 페인트를 칠하여 계속 유지시키면 아직은 쓸 만한 상태로 돌아 갈 수가 있어 나도 좌현 쪽 8번창과 9번창 사이에 있는 물총(WASHING GUN. 주*1) 녀석을 상대하기로 한다.
어느새 얼굴에는 강물의 기원을 이루는 원천수가 솟아 나오듯 땀이 솟아 나오는데, 처음에는 짭짤한 소금기마저 느끼게 하더니 이제는 그저 밍밍한 맹물 같게만 느껴지니 소금 타블렛을 먹어 두어야 할 모양이다.
냇물 마냥 등을 타고 흐르는 물기로 전신이 젖어 들 무렵, 눈에 흘러드는 땀을 닦으랴, 목 뒤 언저리를 두드리랴 하며, 깡깡에 임하려니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망치로 한 번 칠 때마다 뭉떵하니 떨어져 나오는 녹 덩어리를 보며 쾌감도 느꼈지만, 왜 이렇게 되도록 녹을 잡지 않고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하는 앞에 승선하고 있었던 일항사들을 매도하려는 마음도 절로 생긴다.
별로 이런 작업에 능숙치 못한 팔이, 두드리는 망치의 무게나 움직임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살금살금 쉬어가려는 요령도 눈치껏 피우며 작업을 한다.
마침 선수 쪽에서 깡깡을 하다가 기관장의 지시로 나를 도와주러 온 실기사가 일을 거들기 시작하니 훨씬 힘듦이 가셔진다.
한 사람보다는 역시 두 사람이 낫고, 게다가 알게 모르게 서로의 결과를 비교도 하면서 일을 하게 되니 능률도 나아지는 것 같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에게 배당된 셈인 9 번창의 물총 구역을 오늘 모두 끝내자 싶어 실기사를 물총대(臺) 위로 올려 보내며, 지나가는 비이긴 하지만 그래도 빗방울이 조금 뿌려 지는 속에서도, 계속 강행시켜서 끝장내기로 한다.
-실기사! 여기다 자네 이름 새겨 줄까? 어느 정도 일이 끝 날 즈음 농담의 말을 건넸다.
녹을 다 떨어 낸 후 페인트를 칠 할 때, 그곳에 이름을 써서 일했다는 기록을 해줄까? 하는 의미의 말이지만 아직 그런 일은 배에서는 없는 일이다. 순전히 순간적인 내 상상을 말해 본 거다.
본선 실습 기념을 겸해서, 깨끗이 청낙하여 주어 오랫동안 더 이상의 깡깡 작업을 가하지 않아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잘했다고 이름을 써서라도 광고함이 어떨까? -그게 내 상상의 요지였다.
-아닙니다. 실기사는 정색을 하며 거절하는데....
그런 방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극이 되어서 일하려는 동기 부여도 될 터인데 하는 얍삽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내 생각을, 실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어 미안해하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아직 나만큼, 결코 때 묻지 않은 학생이기에 표정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까지 흔들며 거절하는 데, 그 모습이 참 귀엽다.
불쑥 솟아나는 사랑스런 후배여! 하는 심정은 내 속에다 넣어 두었지만 오늘의 깡깡은 힘들고 고된 작업이건만 그래도 이래저래 여러모로 즐거운 작업이 되었다.
주*1 : 갑판상에 설비된 고정 소화 건을 말함. 평상시에는 갑판상 화물 찌꺼기를 쓸어 내는 갑판 청소에 사용하기도 하여 우리는 편하게 그리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