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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선수범, 참 힘이 드는군.

도장작업 아무나 하나요?

by 전희태


JOMARD.(2195)1.jpg 진한 초록색으로 칠해진 윙브리지 바닥.



오후 과업이 시작될 무렵.

브리지로 올라가니 양쪽 윙 브리지 바닥에 진초록색의 마지막 원색 도장 작업을 하던 롤러 브러시를 페인트가 아직도 남아 있는 캔에 담가 둔 채 방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작업자가 점심시간을 지내려 떠났는데 아직 돌아오질 않은 상태로 보인다.


페인팅하다가 한 시간 정도 이상 쉬게 될 경우, 브러시에 묻은 페인트가 굳지 않도록 물속에 담가 두었다가 다시 꺼내 쓰는 게 통례인데 그대로 놔둔 것은 작업자들이 곧 오겠다는 의미나 같은 것이다.


얼른 브러시를 꺼내 보니, 묻어 있는 페인트가 건조를 시작해 약간 걸쭉하게 굳어지는 조짐을 보인다. 더 이상 놔두면, 그대로 딱딱하니 굳어져 못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얼른 브러시를 꺼내어 바닥의 덜 칠해진 곳을 찾아 문 지러 주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쉬운 일이란 게 세상에는 없는 것이겠지만...

처음부터 아예 시작하지 말았어야지~ 그래도 내가 시작하면 즉시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우선 저질러 놓고 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문지르기를 시작한 건데, 아뿔싸 아무도 쳐다보는 이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다.


그렇게 페인트를 시작해서 칠해 준 구역이 계속 늘어나는데 비례하여, 내 얼굴은 홍수 만난 개울 마냥 수월찮은 양의 땀을 흘려주고 있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브러시를 팽개치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솔선수범의 모습은 꼭 뵈어 주리라 다짐하며 힘든 칠을 계속한다.


-선장님, 눈 리포트(Noon Report) 작성 끝났습니다.

정오부터의 당직사관인 2항사가 나를 찾아와 보고를 하다가,

-선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하며 페인트 브러시를 빼았다시피 건네받으려 한다.


회사로 보낼 <정오 위치보고>(주*1) 전보문 작성이 끝냈음을 알리려고 나를 찾아 나섰다가 페인팅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한다고 팔을 걷어 부치며 거들고 나선 것이다.


못 이기는 체하며, 도장 작업을 그에게 넘겨주려는데, 마침 그곳의 페인팅을 담당하여 오전 내 작업을 했던 갑판수가 조금 늦은 점심 후인 이때에야 나타나서는.


-제가 마무리해서 끝내겠습니다.

서둘러 앞으로 나서고 있지만 뒷북을 친 셈이다.

그때쯤에 나타난 것에 은근히 약은 올랐지만, 그래도 점심 종료시간이 크게 늦어진 상황은 아니기에 웃고 넘겨주기로 한다.


대신 내가 힘든 일 일지라도 필요시는 솔선수범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점을 흐뭇하게 생각하기로 맘을 고쳐먹으며, 검토한 정오 위치보고 전문은 작성한 대로 즉시 발송하도록 당직사관에게 지시하며 브리지를 내려왔다.


방에 도착하기 바쁘게 흘렸던 땀을 간단한 찬물 사워로 닦아 냈지만 아직도 더운기가 남아있다.

엊저녁에 춥다고 아침부터 꺼 놓고 공기 순환만 시켜주고 있던 에어컨디셔너에서 나오는 바람만으로는 모자랄 듯싶어 커다란 선풍기를 돌려서 솟아나는 땀을 날려 보내기로 한다.


주*1 : 정오 위치보고 (Daily Noon Report) 선박에서 매일 선내 시간 12시에 자신의 위치와 속력, 기상상태, 연료유의 소모 등 필요한 정보를 규격화된 전보문에 맞추어 작성하여 본사 운항 부서로 보내는 본선의 일일 동정의 보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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