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항구의 이별 전야 모습
어젯밤 9시에 도착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올라왔는데, 오늘 아침에 아내는 김장고추를 사려고 음성에 가려는 예정을 친구와 약속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태풍(앤)이 올라오는 관계로 광양의 부두에 있는 배가 안심이 안 되어 오전 중에 내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야기했다.
아내는 고추 사러가는 일을 포기하겠다며 그 친구의 집에 같이 가서 약속의 취소를 전해주잔다.
엊저녁 광양에서의 일항사 보고는 바람이 조금 불고 비는 제법 내리지만, 하역 작업은 계속 강행되고 있으며, 태풍 앤이 아직은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은 끼치지 않고 있어 괜찮다고 하는 말에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다.
아침 이르게 광양지점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고, 광양의 처제네 집에도 연락하여 현지의 상황을 알아보니 이제는 바람도 제법 분다는 대답이다.
내려가야겠구나! 마음에 앙금이 생기면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엔 작업이 내일 오후 안에 끝날지도 모른다는 일항사의 새로운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찍 준비해두는 게 바쁘지 않아 나으리란 생각이 저녁 6시 막차를 타고 내려가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구의 고속버스 터미널에 배웅을 나온 아내는 5시 50분이 되어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성화대는 나에게 떠밀리어 버스 승차 대를 떠났고 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내 지정 좌석에 앉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보내는데......
언제 되돌아 왔는가? 아내는 내가 앉은 차창 밖에 서서 손을 흔들어 다시 이별의 인사를 청해 온다.
나는 아내가 여인네이니 더 어둡기 전에 집에 들어가는 게 내 맘에 편하겠다 싶어 그리도 빨리 들어가라고 쫓아내듯이 보내려던 것인데....
아내 역시 그런 내 맘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요번에는 석 달 가까이 못 보고 지내야 하는 이별이라니 헤어지기가 그리도 싫기에 막무가내로 다시 찾아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인 만남과 헤어짐의 따스하나 쓸쓸하기도 한 정감이 그 안에서 찾아지어 가만히 한숨을 불어 내준다.
6시가 되었다. 차가 떠나려고 하자 진짜로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는 아내를 보며 이번엔 내 마음이 싸아하니 젖어든다.
너무 그런 마음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이라도 치듯, 엉뚱한 발상의 상상으로 마음을 달래보기로 한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아내를 떼어놓고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불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나와 아내의 오늘 이별 장면에 대입시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본 것이다.
처음부터 버스를 타고 떠날 생각이 아니라, 아내를 속이어 차를 타고 떠난 척하려던 예정을 세워둔 남자가, 자신의 뜻대로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줄 알고, 마음 바빠져 숨겨놓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을 위해 그냥 차를 내려 떠났다 치자.
이번엔 그가 떠난 창가 바깥에, 지금의 내 아내 같이 애틋한 마음을 가진, 불륜남의 아내가 나타나는 경우가 생겨버렸으니, 그녀의 사랑 두터움이 오히려 남편의 잘못된 불장난을 들통 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네! ㅎㅎㅎ
나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지어내어 떠 올린 생각에 혼자 고소를 짓는 동안 차는 복잡한 터미널을 벗어나 시원한 강변도로로 들어서 막힘없이 달리고 있다. 나도 더 이상의 상상은 그만두기로 한다. 그건 상상이라도 우리 부부 사이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어제 올라왔다가, 하룻밤만 자고 오늘 저녁 이렇게 급하게, 쇠로 만들어진, 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사실이, 우리 부부 두 사람 모두가 원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한 배를 책임지고 있는 선장이란 직책은, 현장 일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차라리 현장을 지키는 것이, 멀리 떨어져서 신경 곤두세우며 맘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란 판단이 빠른 이별을 감행하게 만든 것이다.
미리 내려가는 일을 그런 이유만 존재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텐데... 미진한 아쉬움을 쌓으면서, 이별로 상시를 사는 그래서 더욱 이별에 대한 애틋함에 아내나 내가 취해 본 아이들 숨바꼭질 같은 행동이었고, 역설적으로 이어본 엉뚱한 상상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배에 들어가려고, 서울에서 버스를 탈 무렵 미리 연락해 두었던 통차였는데, 예정보다 빨리 도착한 광양 터미널이라 한 5분 기다리고 있으려니 나타난다.
배의 삼부 직장들이 외출을 나와서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그곳에 들려 그들도 같이 태우고 들어가자고 통차 기사가 이야기하기에 그들이 쉬고 있다는 노래방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그렇게 부르러 간 사람 대신 조리장이 나오더니 잠깐만 안에 들어가서 몇 곡 부른 후 배로 가자며 끌어들인다. 떠남의 아쉬움에 젖은 그들의 손을 야박하게 뿌리치며 혼자 귀선 할 수가 없어 못 이기는 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서서 내일이면 떠나야 할 항구에서의 한밤 중 노래방과 만난다.
<항구의 이별> 쯤의 가요가 흘러나옴직한 분위기 속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든 갑판장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제법 돈께나 들였음직한 매끈한 가창 솜씨를 보이고 있다.
그 목소리와 어울려 흘러나온 노래 -잘 있거라 부산항 -역시 마도로스의 이별 이야기이다. 절로 고소를 지어 보이게 한다.
이별의 씁쓸함을 되새김질시켜주듯, 쉬고 있던 빗줄기가 주룩주룩 노래방 출입문을 적셔주며 카운터 벽면의 시계도 자정을 향한 시침의 달리기로 간단없이 째깍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