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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해역 잘 달리고 있다오

자정 때만 되면 종종 생각나는 일

by 전희태
%B8յ%BF2(7938)1.jpg 새 날 아침을 이렇게 바다 위에서 닻을 내려주고 맞이하는 일이야 잦은 일이지요. 허나 그 날이 새해의 첫날인 경우는 마음이 좀... 그렇지요.


언제였던가? 뭐, 아래와 비슷한 물음으로 사보에서 앙케트 조사를 해 왔었다.

대답을 써 보다가 아무래도 너무 제 자랑만 늘어놓는 것 같아 그냥 덮어 두었었는데... 이제와 보니

어느 때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었구나~ 하는 맘이 들어서 되돌려 베껴 놓는다.


1) 1999년도 제야는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2) 새해가 들어서면서 우리 주위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일은?

3) 세기가 변하면 어떤 것이 변화될까요?

4)새 세기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요? 그러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5)<밀레니엄, 일구구구, 이공공공, 자기 이름>으로 삼행시 짓기


1)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 중계로 보내 줄 보신각 타종 광경이라도 볼까요?

바람은 그렇지만 아마도 배 안에서 컴퓨터가 Y2K에 적응하는 양상을 지켜보겠지요.

(아직 세기의 바뀜은 일 년이 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2) 조선조 후기에 사색당파를 이루고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던 선조들의 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은, (그렇게 꼬집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하하려는 일본인 들이라지만,) 정치권의 생산성 없는 당리당략을 위한 소모전, 이 것만은 없애 버리자.


3) 세기가 변한다고 해가 안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4) 물론 다시 태어나야지요. 그때쯤에는 전생을 알게 되는 방법도 개발되어,

-아 때 묻지 않았던 20세기의 내가 진짜로 그립구나!-라는 독백이라도 할 것 같군요.


5) 밀레니엄, 일구구구, 이공공공, 자기 이름으로 삼행시 짓기


밀-밀물처럼 다가서며 만난 첫 순간

레-레퍼토리에도 없던 흥분한 속삭임

니-니캉 내캉 동께미 살 제이. (너랑 나랑 소꿉장난하자꾸나.)

엄-엄숙한 그 선언에 하나 된 마음.

일-일찍이 누구나 얻기 원하는

구-구하기 어려운 현모양처를

구-구름이 햇살 메겨 노을 되듯이

구-구수한 팥밥 누룽지 돼 왔구나.


이-이제는 맛도 향도 그림도 하나

공-공연히 심술부려 불퉁거려도

공-공기같이 서로를 믿고 사는 터

공-공짜처럼 얻은 삶 절대 아녜요.

전-전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희-희죽이 큰 웃음 삼켜 가면서

태-태연히 아닌 척 시침일 뗐지만~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었건만, 하마터면 중간에 영원히 도중하차 하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를 사건도 있었다.


몇 년 전. 한밤중-그야말로 미드 나이트 12 시에- 달리고 있는 우리 배로 몰래 기어 올라와서 내 방에 침입하여 잠이 깬 나를 묶어 놓고, 위협하여 금고를 열게 해서 털어 간 해적들을 만났던 바로 그 해역을, 그때보다 세 시간 정도 이른 저녁 9시 정도인 지금에 또 지나가고 있다.


새삼 그날의 반항할 수 없었던 억울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그 장소인데, 그 밤도 열심히 불빛을 비추던 등대가 그때와 다름없는 같은 동작으로 불빛을 비쳐주고 있다.

새삼 방문을 모두 꽁꽁 걸어 잠그고 브리지로 올라갔다.

선수 창을 통해 서너 개의 불빛이 산재하여 밝게 비치고 있는데, 어선들이 조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젯밤 GELASA CHANNEL을 지날 때 해적 침입에 대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아 잠도 옳게 자지 못하고 피곤이 겹쳐서인가 오늘의 혈당 검사 성적이 좀 높은 편이다.

아침 운동도 못했기에 저녁 식사 전에 아침에 하던 만큼의 운동은 했다고 여겼는데도 요 근래 높은 편인 162 이니까, 어쩌면 저녁 식사의 돼지갈비를 좀 짜게 먹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 지나는 곳은 해적이 발호했던 해역이란 점만 빼놓으면, 항해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고 기상도 아주 조용한 바람직한 열대 해역이다.

보아하니 오늘 밤에는 그런 불한당들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브리지에서는 서치라이트를 비쳐줘 가며, 갑판에선 순찰을 도는 해적방지 당직을 오늘 밤까지 사흘째 진행하고 있다.


두 번 다시 사후 약방문이 되지 않도록, 내 방문도 철저히 잠겨진 걸 확인한 후, 잠자리에 들기로 작정을 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의 조명을 모두 끄고, 커튼은 열어 놓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누군가 내방에 침입하여 불을 킬 경우 불빛이 창밖으로 비쳐나가 브리지 당직자들이 내방의 이상 상황을 알아내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해적에게 당한 후에 생기게 된 행동이다.


방안의 어둠 속에서 앞쪽 창 밖을 다시 살펴본다. 좀 전에 보았던 어선의 불빛도 점점 멀어지는데, 어둠에 길 들여진 눈길을 따라 선수루 마스트의 모습도 익숙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칼리만탄(보르네오)의 서쪽에서, 그렇게 배는 열심히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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