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식된 청수 탱크의 녹물
설악산 오색약수의 물을 받아다가 며칠 가만히 놔두면 붉은색의 앙금이 갈아 앉는 걸 발견할 수가 있다. 그래도 그것은 철분이 많이 함유된 천연의 샘물로 많은 사람들의 호평과 찬사를 받는 약수 뭏이다.
그런데 우리 배에서 사용하는 청수는 탱크의 끝물쯤 되면 아예 벌건 자태를 공공연히 드러내어 마치 미국식 커피를 타 놓은 듯싶은 색깔을 가지고 있어 떨떠름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특히 바람이 불어 배가 좀 흔들리고 난 다음에는 한층 더 붉은색을 띄우곤 한다.
오늘까지 두 개의 청수 탱크 중 좌현 탱크의 물을 사용하면서 2~3일 지나면 바닥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모레)가 되면 아예 탱크를 깨끗이 닦아 내고 쓸어 주어서, 다음에 수급받는 물부터는 깨끗하게 받아먹을 수 있도록 청소를 지시해두었다.
아직까지 이틀 이상 더 사용할 만큼 물이 남아 있는 오늘이지만, 마침 냉면을 먹는 날인데 벌건 녹물로 씻은 국수를 먹을 수가 없다며 좀 남은 물은 퍼내어 버릴 셈 치고 기관장이 바꿔버렸다. 이틀이나 당겨서 우현 탱크로 물의 공급을 바꿔 준 것이다.
손빨래로 매일 해오던 빨래였지만, 그 간은 너무 짙은 녹물이라 빨래를 안 하고 기다리면서 문득, 이 벌게진 녹물로 머리를 감으면 흰 터럭이 염색되어서 보기 좋게 되지는 않을까? 허무맹랑한 상상도 떠 올려 봤었다.
엊그제 운동 후, 땀을 너무 흘려 마지못해 머리를 감으면서 떠 올렸던 그 생각은 감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경수(硬水)의 뻣뻣한 기운과 뻐등뻐등 한 감촉을 함께 느끼며 기분이 찝찝한 머리 감은 상태로 되어 버리는 바람에 흰 터럭이 염색되었는지 여부는 살필 겨를이 없었다.
이제 물탱크를 바꿔주어 물이 깨끗해진 김에, 밀어 놨던 빨래를 모아서 오래간만에 세탁기에 넣어 돌리기 시작하며 머리도 다시 감기로 한다.
이렇듯 마음먹고 청수를 알뜰하게 사용하려는 의지는, 청수가 기름(연료유)에 맞먹는 중요한 소모품이라 체계적인 사용이 필연적인 매우 소중하게 취급해야 하는 물품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좀은 물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 회항할 때 까지는 충분히 쓸 수 있겠다는 계산을 믿으며 하는 결단의 행동이기도 하다.
사방이 바닷물로 꽉 차 있는 환경에서 물 걱정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때로는 맥 빠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바닷물을 증류시켜 청수로 만들 수도 있기에, 물=기름이라는 등식이 당연한 현실로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