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항 중 행운목이 꽃을 피운 집으로 가는 시간은
내일 오전 중의 출항이란 예정을 안고, 어젯밤 잠깐 집에 다니러 올라 온 때문에 혹시 그동안 있을지 모르는 스케줄의 변경을 우려하여 오늘 오전 중은 거의 대기 상태 같이 집안에 있었다.
오후 두 시 무렵에 만 하루가 늦어진다는 현장의 연락을 받고, 겨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여유를 찾아내어 오랜 간만의 안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걸은 K 형은 퇴직 후 집에서 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전해주는 N 형의 소식인데 좀 우울한 이야기다. 심근경색이라는 겁나는 병명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데 상태가 꽤 심각한 편으로 새로운 치료 방안을 연구하는 케이스로 외국 의료진까지 합세한 진료를 받고 있단다.
또 다른 K형은 부부 둘이서 김치공장을 차려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인데 새삼스레 전공을 살려 일을 한다니 그나마 찡그렸던 얼굴을 펴며 다음 소식을 듣게 한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며느리와 사위 모두를 본 M형만이 쌍둥이를 포함한 세 손자들의 재롱을 즐기며 퇴근 후의 집안 생활에 푹 빠져 있다는 이야기가 우리들 중 가장 안정된 생활을 보이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시간을 내어 외출하여 모두 만나고 싶은 생각 굴뚝같지만, 우리나라에 내가 타던 배가 입항하면 친구들 모두가 틈을 내서라도 모여 즐거운 해후를 하던 예전 내가 친구들 중심에 서 있었던 세월은 이젠 꿈도 꿀 수 없는 지나간 세월이 된 것을 새삼 깨닫고 자제한다.
하루를 더 집에서 지낼 수 있다는 일은 이렇듯 옛일을 상기해가며, 푸짐한 덤을 상으로 받은 것 마냥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니 좋기는 하지만, 생활인으로서 내 직책에 맞는 태도는 작업 상황이 늦어졌다는 연락에 기쁘기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일이다.
선장이란 직책의 사람이 이런 맘씨를 가지면 안 되는 이유야 뻔하다. 남의 녹을 먹는 현장의 책임자가 현장의 일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지는 못할망정 일의 늦어짐을 두고 기뻐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딘가 불성실한 태도 같기 때문이다.
입장인즉 그렇지만 한번 떠나면 몇 날 며칠을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생활인의 입장으로 본다면 하루 한 시간이라도 더 가족과 있고 싶어 하는 심정을 내 몰라라 할 수만은 없어 보이는 일이다.
마침 지방에서 고속버스 편으로 탁송한 짐을 찾으러 아내와 함께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간 김에, 내일 아침 여덟 시에 포항을 향해 떠나는 차표를 미리 예매하였다.
24시간 재선의 의무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하룻밤을 더 자고 갈 수 있게 된 고마움에 그만큼 미리 내려가 출항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는 마음으로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식구들 모두 모여 외식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출근하여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막내에게도 전화를 걸어 일찍 퇴근하라고 종용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은근한 기쁨에 들떠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