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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GIPANI 꽃

어쩌다 나와의 인연이 다 해버린 꽃나무(사진. 인터넷에서)

by 전희태


frangipanil(1644)1.jpg 붉은 색 FRANGIPANI (인터넷에서)


IMG_0126(7812)1.jpg 뚝섬 서울숲 곤충관에서 만난 FRANGIPANI 나무 모습



분명히 어제(10일) 아침에 접안하고 난 후 출항 예정은 내일(12일) 12시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데 아침에 남은 화물 양과 작업 속도를 보더니 오늘 낮 고조시에 출항을 한다고 한다.

제반 상황을 내일 낮 출항으로 맞추어 진행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미뤄놓고 있던 일들을 급하게 챙기며 오늘 낮 출항에 대느라 부산을 떨게 생겼다.


제일 큰 일은, 어제 오후에 서둘러가며 좀은 무리하게 주부식을 실었는데 결과적으론 그 서두름이 빨라진 오늘의 출항에는 잘 대비된 셈이지만, 아직까지 그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는 일이다.


바쁜 일정으로 미처 준비 못했던 부식류 구입과 선원들의 개인 부탁 물품을 사러 시내에 나간 선식 회사 사람을 급하게 불러들이어 계산부터 끝내야 하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


서둘러 들어온 그와 계산을 끝내고 나니, 이제 막바지 트리밍 카고(주*1)를 싣는 일만 남아 9번 창과 1번 창에 나눠 싣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워키토키로 연락하는 상황을 체크해보니 실어야 할 화물이 아직 100 여 톤이 남았다는데 앞쪽의 흘수가 예상치를 넘어 그대로 싣게 되면 흘수 오버로 출항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얼른 작업을 중단시킨 후, 남은 양을 모두 9 번창에 실어 주도록 요청하니 송화주 측에서 그렇게 해준다고 응답해 준다.

문제는 방금 닫았던 9 번창을 다시 열어 주려고 하는데, 유압 작키가 고장이 나서 해치커버가 열릴 생각을 안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시간이 출항해야 할 고조시에 점점 다가서니 더 이상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실어 줄 여유가 없게, 출항 시간이 촉박해졌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옮겨 실어 보려던 100톤을 포기하고 출항해야 할 형편으로 일이 밀려버린 것이다.


도선사도 승선하여 기다리고, 터그보트도 이미 선 측에 붙이고 있다. 문제는 선수에 약간의 흘수가 오버된 것을 도선사가 인정하고 출항에 응해 주느냐 하는 일과 항만 당국에서 그 정도의 흘수 오버를 묵인 내지는 인정해주어 출항에 동의해 주느냐 하는 점이다.

도선사의 양해와 포트 컨트롤의 허가 모두를 얻어 내었다. 서베이어의 동의 하에 흘수 점검을 하여 최종 화물 양을 산출해 낸 후, 출항하자는데 나도 동의하였다.


결국 100톤의 화물은 싣지 못하고 끊어내 버리는 힘든 출항을 하는데, 항내의 날씨가 그나마 잔잔하여 천소 조선에 안전한 보탬이 되니 다행이다.


부두에서 떨어지며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리지에 내려다 보이는 배의 꽁지가 지나간 자리에 나타나는 푸로펠러의 휘둘림으로 인한 누런 뻘 물의 와류를 보며 혹시 선저 접촉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 되어 조마조마하게 살펴본다.

그런 현상이 배 밑이 해저와 닿아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타를 쓸 때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천수 효과의 현상이라는 믿음이 측심기에 나타나는 눈금으로도 알 수 있어 다행이다.


또한 이곳 호주라는 나라의 항만 당국이 세워놓은 안전 운항 규칙은 그야말로 안전한 범위를 확보하고 시행하는 걸로 소문이 나 있으니, 진짜로 여유 있는 안전한 수치 아래 운항을 허가해 준 것이라 믿어지어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정보다 하루가 빠르게 출항한 것과 그에 따라 절감되는 운항비가 무시 못할 액수일 거고..., 오히려 그렇게 얻은 만 하루라는 조출(早出)을 기뻐하기로 한다.



어느새 항구의 출구 방파제에 도착하여 빠져나오는데, 옆으로 몰려드는 너울로 인해 갑자기 배가 슬렁슬렁 롤링을 준비한다.


출항할 때 살펴본 방파제 바깥 외항 쪽에 백파가 눈에 띄어서, 혹시 입구를 빠져나갈 때 롤링을 만나는 건 아닐까 떠 올렸던 걱정이 그대로 이루어져 선체를 횡으로 흔들어 준다.


도선사를 데려가려고 7 번창 위 헬리포트에 내려앉아 기다리던 헬리콥터도 도선사가 이미 탔건만 그 횡요에 떠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선수를 좀 안전한 각도로 돌려 달라고 요청해 온다.


우리 배의 안전 상황부터 즉시 눈어림으로 측정한 후, 배를 잠시 오른쪽으로 돌려서 안정된 자세를 잡아주니 즉시 날아오른다. 진짜 잠자리 같이 행동하는 비행기이다.

헬기가 떠나자마자 얼른 우리의 침로로 들어서게 배를 원래의 코스로 돌려준다. 이로서 출항 작업이 완전히 끝나고 안전한 항해에 들어선 것이다. 당직 사관에게 조선을 인계해주고 방으로 내려왔다.


잠깐의 롤링으로 인해 어수선해진 실내를 정돈하며 청소를 하고 있는데, 다시 심한 횡요가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반사적으로 책상 모서리를 붙잡고, 다리에 힘을 준 후, 몸을 바로 세우도록 균형을 잡으며 롤링에 대항해 본다.

아무래도 몇 번 더 흔들어 주어 배에 실린 석탄이 제대로 다져지는 일을 도와줄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쿵, 꽝! 하는 소리가 들리며 창가에 올려놓아 햇볕을 쪼이게 하던 화분이 떨어진다. 한쪽에선 마시려고 내놨던 음료수 캔이 떨어져 내려 뒹군다. 음료수 캔은 멀쩡하니 괜찮은데, 화분은 엎어져 떨어지며, 꽃봉오리를 잔뜩 머리에 이고 있던 꽃대의 밑동이를 처참하게 부러뜨렸다.


마치 심한 폭격을 받은 폐허 속에서 부상당한 몸으로 겨우 살아남게 된 삶을 애걸하는 부상병 같은 모습으로 꽃대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다시 한번 더 흔들고 지나가고 있는 선체 횡요와 그런 날씨에 대해, 불끈 솟아오르는 짜증을 참아가며, 몸을 맡기느라 잠시 머뭇거린다.


어느덧 외해로 나서 오히려 좀 더 잔잔해진 선체 동요를 감지하며 물을 담은 컵을 가져다 부러진 꽃대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꽂아 주었다. 그리고 코를 들이대어 가만히 냄새를 맡아본다.


아련히 코끝을 스치며 풍겨오는 향내는 마치 그 흰색 꽃의 비운을 더욱 가슴 아프게 저며주어, 야래향과도 비슷한 은은한 냄새가 더욱더 슬픔을 일깨워 준다. 어제 상륙하였을 때 사 갖고 온 꽃나무였다.


지난 배에서 하선할 때 집에 갔다 놓은 똑같은 종류의 화분이 있었으므로 같은 꽃나무로써는 두 번째 인연을 맺어보려던 꽃나무이다.


그 첫 번째 나무는 붉은색 꽃나무로 작년에 뉴캐슬에서 남의 정원에 있는 나무를 보고 주인의 허락을 받아 한 가지를 얻어, 꺾꽂이로 심어 배 안에서 뿌리를 내려 일 년간 키웠던 것인데 집에 가서 겨울을 춥게 지내다가 그만 잠깐 한눈팔다가 동사하고 말았다.

이제껏 정확한 이름도 모르고 그저 꽃의 향기가 은근하니 마음에 들어 좋아하고 있었는데, 어제 상륙해서 그 꽃나무를 화원에서 만나 사면서, 정확한 이름을 알게 되었었다.


<FRANGIPANI WHITE> 가 화분에 적힌 그 꽃나무의 이름이다. 앞의 단어가 나무 이름이고 뒤의 색깔을 명기한 걸 보니 최소한 빨간색과 하얀색 두 가지가 있는 모양이다.


태양 아래 덥고 뜨거운 기온 하에서 재배하라는 이야기와 FROST FREE로 하여 주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마치 선인장을 두고 하는 말 같은 지시사항이다.


사실 몸체는 수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선인장들의 몸체와 아주 비슷한 모양을 갖고 있는데 단지 고무나무 잎을 닮은 잎사귀가 독특한 무늬의 그물망을 갖고 있으며 호주 현지에서는 작은 골목길 가로수로도 만날 수 있으니 선인장 종류는 아니다.


어쨌거나 이들 나무와 나의 인연은 마치 이룰 수 없는 연인 사이 같은 운명이었을까? 이번에는 출항 시에 만난 작은 소요로 순간적으로 꽃대가 싹둑 꺾인 채 나한테 남겨지어 마음 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PS : 내가 찍어서 갖고 있던 꽃나무의 사진을 찾아내질 못했고, 그 꽃나무 마저 이미 저승에서 꽃 피우고 있게 된 현실에서 할 수 없이 인터넷을 뒤져, 두 가지 색깔의 꽃 사진을 찾아 올리면서도 어딘가 좀 모자란 심정이다.

그러다가 진짜 그 꽃나무를 서울 숲의 온실에서 찾아내며 사진을 찍었다. 한데 <푸르 메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리고 있다. 영어로는 Pulumeria라는 단어인데, FRANGIPANI와 함께 두 단어를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보니 모두 협죽도과의 식물이라 칭했는데, 어쩌면 속명이 다른 같은 과의 나무를 두고 지방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다.


주 *1 트리밍 카고(TrimmingCargo) : 선박이 화물을 선적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전후방의 흘수 차이를 고르게 하거나 줄이기 위해 전, 후방 선창에다 각각 양을 조정해가며 싣는 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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