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생일 찾아 먹었네.
아침 식탁에 차려진 미역국을 맛있게 들고 있는데, 일부러 찾아온 조리장이 인사를 한다.
-선장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어? 그러면 이거 내 생일용 미역국이야?
-예, 오늘이 선장님 생신 맞지 않습니까?
-그래? 난 잊고 있었는데... 하여튼 고마우이.
그런 인사말을 주고 받든 순간까지도 나는 앞으로 나에게 남겨져 있는 나만의 세월이 제법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년 하루만 있는 오늘이라는 숫자의 날이 벌써 쉰여덟 번이라는 적지 않은 셈을 헤아리며 나의 인생 위를 지났다는 사실을, 오늘 이 아침에 새삼 인정 안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유행가의 가사처럼 <아니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봐...>하는 식의 푸념을 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세월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잊고 있던 생일 인사를 받으며 어렴풋이 깨닫다가 갑자기 왜 그렇게도 후회되는 일들은 뒤를 이어 떠 오르는지, 당황할 지경이다.
아마도 이루어 놓은 일도 없는 것 같고, 어디 큰소리치며 내어 놓을 일도 변변히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이 날까지 살아온, -세월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내가 너무 초라하다는 아쉬움이 들어서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밑바닥 인생을 헤매며 고생을 한 그런 삶도 아니다. 그저 어정쩡하니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흘러 온 것이란 말이 맞겠지만, 그래도 큰 후회 안 하며 아쉬움 없이 살아온 것이 행복 아니냐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를 추켜 세우며 지탱하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통신실을 찾아갔다.
-당신 생신을 축하해요.
-그 말을 들으려고 전화를 했지.
감도가 많이 떨어지는 SSB 전화가 걸리면서 시작된 아내와의 통화였다.
배는 호주 위쪽에 있는 파푸아 뉴기니이의 동쪽 끝을 빠져나와 산호 해(CORRALSEA)라는 작은 바다에 들어서 북에서 남으로 남하하는데, 아내와의 허공을 격한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미역국 맛있게 드셨어요?
내가 집에 있었으면 미역국을 끓여주며 축하해 주었을, 자신의 남편 생일을 배에다 맡기고 있는 형편이 안타까웠던지 인사말 끝나기가 바쁘게 다짜고짜 그 말부터 물어 온다.
-아침에 특별한 미역국을 들었어요.
누군가 내 생일을 기억해 준 사람이 있어서 일부러 끓여준 미역국을 굴비도 한 마리 곁들이어 맛있게 아침으로 들었다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 준다.
기분 좋게 대답해 주며 두 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아직 서울의 집에서는 식사 시간 전이라는 걸 언뜻 깨닫는다.
-그럼 또 걸게요. 그리고 내 생일 미역국 맛있게 드세요. 해본다.
오늘 우리 집 아침 국은 틀림없이 내 생일을 위한 미역국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기분이 들어 끝말은 이렇게 보태며 통화를 끝낸 것이다.
집에서는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움인 생일 공간을, 직장인 배 안에서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가 미역국을 끓여주어 얻어먹을 수 있게 그 공간을 극복시켜준 사람이 조리 장이다.
그가 승조원 명부를 참고하여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특별히 오늘 아침은 평소에 먹는 된장국(주*1)이 아닌 미역국을 대신 끓여서 기본적인 생일 차림을 받게 해 준 것이다.
이렇게 승조원 들의 생일 날짜를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가, 그 날을 맞이하면 조그마한 표시라도 해주어 집에서와는 비교가 안 되더라도, 작은 즐거움을 만들어 주고받게 했을 때, 선내 분위기는 자연스레 훈훈한 정이 흐르는 사람 사는 곳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내 생일을 위한 미역국을 먹으며, 오늘을 작은 기쁨으로 받아 드리게 해 준, 센스 있게 일 처리하는 조리장을 그러니 고맙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자그마한 신경을 쓰지만, 주위를 배려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생활 태도로서, 자신의 직분을 행사하는 사람을 부하로 두고 있으니, 일에서도 나는 즐겁고 기쁜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고 즐거운 승선 생활을 만들어 주는 철덕(鐵德 주*2)뿐만이 아니라 인덕(人德 주*3)까지도 두루 갖추고 있는 뱃사람이라 스스로를 자부하게 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맞이한 오늘 생일을 진짜로 지난날과는 달라진 살가운 모습으로 간직하기로 한다.
주*1 된장국 :
대부분의 국적 선에서는 아침 식사에 된장국이 나온다. 약간의 채소와 된장만으로 맛과 간을 낸 이 국은 의외로 담백하지만 구수한 맛으로 인해 승선 중에는 잘 모르고 지나지만, 배를 떠나 있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배에서의 음식 중 한 가지이다.
주*2 철덕(鐵德) :
일명 쇠 덕이라고 말함. 배를 타면서 바라는 배와의 안전한 인연. 쇠로 만들어진 배와 어울려지는 기상상황을 포함한 모든 해난, 안전사고 등 여러 어려움을 어떻게 융화를 이루며 헤쳐 나가는가를-아니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과는 될수록 인연이 먼 승선 생활을 이루어 주는 품성이라고나 할까?
주*3 인덕(人德) :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 간의 인화와 조화를 이루는 품성. 선원들은 승선 발령을 받고 어떤 배를 찾아갈 때, 누가 그 배의 선기장인가 부터 먼저 알아보려고 한다. 철덕과 인덕이 많은 선,기장과 같이 타는 게 그만큼 편하고, 즐겁고, 안전한 승선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