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어느 날만 생각하면 머쓱해지는 마음
요즈음 육상의 친지나 가족들이 보여주고 싶은 TV 프로그램 중 무료한 시간을 달랠 때 보라며 연속극이나 음악 기타 필요한 것을 녹화해서 떠 놓은 테이프를 배로 보내주는 일을 벌여주곤 한다.
처음에 그 일은 회사 차원에서 선원들을 위한 후생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육상근무 직원들에게 개별적으로 맡겨진 프로그램을 녹화하여 배로 보내주는 일을 추진한 해운회사도 있어 제법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며 녹화에 시들해지는 일이 잦아지며 결국 유야무야가 되었다.
그러나 배에서의 수요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이니, 각 배에서는 선내 오락비라는 항목의 적은 액수의 선용금을 이들 녹화 테이프를 구하는 데 대부분 투자하게 되었다.
선박을 상대로 육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 자연히 공급 수요의 법칙에 따라 이런 테이프를 공급해주는 업체도 생겼고, 점점 여럿으로 불어난 그들 간에 경쟁이 심화되어 가던 어느 날. 불법 복사 혐의로 저희들끼리 치고받으며 고발당 한 업체가 생겨나면서 경국 이 바닥은 쑥밭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각박한 세월이 찾아오면서 제일 먼저 선의의 피해를 본 사람들은 선원들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구경만 하기엔 너무나 단절되기 싫은 육상 문화에의 목 마름이라,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의지는 우리 배에선 형편이 닿는 사람부터 가족들에게 부탁하여 개인적으로 녹화 테이프를 만들어 받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전 지구적 추세인, 지적재산권(저작권) 보호 차원에서 볼 때, 각 방송국이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녹화 판매하는 테이프를 구하여 공급받는 방법을 택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공급해 줄 수 있는 소요 경비를 선원들 각자의 주머니에서 갹출해서 충당하기에는 너무 과한 편이며 시간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으므로, 선원들은 회사가 나서 주길 바라지만, 사회적 분위기나 회사의 여력이 아직은 거기까지 닿는 형편이 아닌 듯싶다.
그래서 자구책의 한 방편으로 활성화된 방법이 친가족을 통한 프로그램 녹화였던 것이다.
알뜰한 가족으로부터 녹화해 받은 테이프를 입항하였을 때 받게 되면 그 항차가 끝날 때까지 배안에서 열심히 돌려본 후에, 기회가 닿으면 다음번에 기항한 항구에서 자매선은 물론 타회사의 국적선이나 수출선과 만났을 때 장기간 보았던 그 물건을 다른 프로그램과 맞교환하는 방법으로 서로의 목마름을 해소하여 왔다.
이번 국내 기항하면서 보유하게 된 프로그램 중에서 몇 달 전인 추석날 특집으로, 주부들이 트로트 가요를 대항하여 부르든 걸 녹화 해 놓은 것이 있었는 데, 며칠 전 내 방 VTR에 올려놓고 혼자 보고 있었다.
중간에 고향 이야기,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등을 곁들이며, 진행되는 걸 보다가 순간적으로 울컥 솟아나는 감정의 북받침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솟아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훔쳐내며 혼자 쑥스러워했다.
나는 아직 어머님을 모신 생활로 살고 있는데,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의 어머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다니, 내가 생각해도 그런 감정의 여림은 너무나 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로 치부되건만,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어 갈수록 오히려 점점 심해지는 그런 상황을 만나며 당혹한 마음 금 할 길이 없는 거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청승맞다 싶게 여려진 내 감정의 추이는 지금 당장 앞에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옛 일을 문득 기억에서 되 살리다가, 당시의 잘잘못이나 쑥스러웠던 일이 강조되어 떠 오르며 그에 파묻히는 일도 종종 생기고 있다.
멜랑꼴리 한 감정이 시큰둥하니 찾아와 콧속을 찡하니 만드는가 하면 쓸데없는 그리움을 만들어 그 안에 빠져들게 하면서 말이다.
나이가 들어 생기는 뇌의 작용이겠거니 하지만, 이래서 옛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거나 남 못 할 짓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삶을 경계하면서 살았던 모양이다.
예전의 어느 날. 그 당시 처음에는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큰 실수로 치부되는 일을 느닷없이 생각해 내며, 왜 그렇게 했단 말인가 하는 후회되는 심정에 혼자서도 얼굴 붉히는 일 한 가지가 있어, 여기에 고백해 본다.
지금도 그렇게 후회되는 그 일은, 내 생애의 청춘 기인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육상에서 근무하며 행복하게 살았던 짧았던 세월, 신촌의 한 시민 아파트에 거주하던 때의 일이다.
날림으로 지었던 건너편 언덕 위의 시민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지는 사고가 나면서, 내가 전세로 살고 있던 아파트도 철거하고 새로이 시민 아파트로 짓는다는 소문에 집 값은 계속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달리기에서 탈락하지 않으려고 아예 아파트를 사는 것이 나을 것이란 판단에 집주인을 만나 계약을 하려고 했다.
다방을 하고 있다던 그 주인을 만나기 위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한 할아버지를 통해 근무처의 이름과 대강의 위치를 알아내어 집주인과의 만남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국 집주인을 찾아가서 집값도 원만히 타협되어 잔금까지 치른 후 아파트가 내 것이 된 며칠 후, 연락처를 알려 주었던 그 할아버지가 소개비조로 복비를 받으러 왔다고 기별 해왔다.
이웃에 사는 정으로 서로 돕는 작은 교류로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적당한 인사치레로 끝내도 되는 것으로 작정하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런데, 일부러 찾아와 복덕방식의 복비로 좀 무리한 금액을 요구하는 그분에게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하여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마음에 점잖게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좀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어 호통을 치며 부당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노인네에게 너무 한 것은 아닌지? 하는 후회하는 마음도 한편으론 들었다.
어쨌거나 상대는 기가 꺾이어 그냥 되돌아 갔는데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그 할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숙환으로 인해 세상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그 할아버지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행한 내 행동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도 같이 전해져 왔다.
내가 일부러 취했던 그 무례한 행동을 나도 그 후 흥분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는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후회의 정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분과의 사이에 있었던 오해랄 수 있는 행위에 대해 해명도 하고 서로의 감정을 풀었어야 하는 걸 풀지 못한 채, 영원히 헤어지게 된 점이 이제와 나의 가슴에 맺힌 한 작은 아쉬움 되어 남아버린 것이다.
지금도 뜬 금 없이 그 당시 내가 취했던 행동이 한 번씩 떠 오르면, 목소리 높여 소리쳤던 그 일이 회한의 정을 더욱 깊게 해주며 나를 머쓱하니 연민의 정을 담아 눈물 핑 돌게 만들고 있다.
언젠가 산에라도 가서, 목청 껏 큰소리로 털어 버리면 될까? 그 회한(悔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