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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의 첫 출항

보트 데크에서 바라 본 일출의 모습.

by 전희태


DSCF0081.JPG 동승기간 아내가 만들어 낸 성모상.


어제의 출항 예정이 오늘로 늦어진 후, 집으로 외출 나갔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와서 출항의 시간을 조용히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하역 작업도 조금 전에 끝났고, 도선사도 이미 승선하여 출항에 대비하여 기다리고 있다.


술렁이는 분위기지만, 조용한 속에 화물 하역에 따른 모든 서류에 서명을 해 주고 동참하고 있던 지점의 직원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며 필요한 출항 서류를 넘겨받는다.


-이번 항차 다음 항구에서 필요한 서류입니다. 그럼 선장님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다음 항차에도 또 만나 뵙시다.

전달받은 Port Clearance 서류를 소중히 챙겨 들고 브리지로 올라간다.


도선사를 브리지로 안내하여 커피를 대접하면서, 출항 명령을 기다리고 있든 3 항사에게 지시를 내린다.

-3항사, 출항 S/by (Stand by) 벨을 울려라.

-예, 출항 벨 울리겠습니다.

기다란 장음의 선내 비상벨의 울림이 끝난 후,

-선내 전 부서 출항 준비 배치 붙어!,

반복되는 3항사의 애 띤 목소리가 선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조용하던 선내 분위기가 술렁술렁 활기를 되찾으며 갑판으로 나서는 선원들의 모습이 눈에 뜨인다. 이윽고 선수 부서(일항사 담당)와 선미 부서(이항사 담당)에서 출항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기관실에서도 기관의 사용 준비가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훡슬(F'cle=Forecastle,선수부), 푸프(Poop, 선미부)! 여기는 브리지(Bridge)!

직접 선수, 선미 부서를 워키토키로 불러 응답을 받은 후.


-선수와 선미에 각각 터그보트를 잡은 후, 라인 싱글 업(Single Up) 해주세요.

-브리지, 훡슬. 선수 좌현에 터그보트 잡았습니다.

-브리지, 푸프. 선미 좌현에 터그보트 잡았습니다.


잠시 지나니 선수, 미 부서에서 계류삭을 단선으로 해 놓았음을 보고해 온다.


-브리지, 푸프 선미 라인 싱글 업써

-브리지, 훡슬 선수 라인 싱글 업써


-올 라인 싱글 업써! (AllLine Single Up sir.)

각 부서별로 계류 삭을 모두 단선으로 잡았음이 확인되는 3항사의 복창이다.


이렇듯 명령을 주고받는 워키토키의 목소리가 분주하게 오가며 출항의 각 단계별 작업은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윽고,


-올 라인 렛고!( All Line Let Go)

라는 모든 출항 준비가 완료됨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계류삭을 걷어 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항구와 맺고 있던 마지막 인연의 줄을 걷어 들이는 의식을 위해 배에서는 한 줄만 걸어 놓고 있던 팽팽한 계류삭을 늘어뜨려주고 육상의 줄잡이 일꾼들은 늘어진 계류삭을 당겨서 비트로부터 분리시켜주는 작업을 실시해준다.


드디어 계류삭의 육상 비트에 걸렸던 끄트머리 아이(Eye)가 벗겨지니 배의 윈치가 서서히 돌면서 계류삭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브리지! 훡슬, 훡슬 올라인 크리어 써(Bridge! F'cle, F'cle All line Clear Sir.)

-브리지! 푸프, 올라인 크리어 써.(Bridge! Poop, Poop All line ClearSir.)

선수, 미부 계류삭들을 모두 걷어 들인 후, 마지막으로 선미의 계류삭이 프로펠러 사용에 방해되지 않겠다는 보고 까지 들어온다.


즉시 뱃머리를 외해 쪽으로 돌려주기 위한 터그보트들의 힘찬 밀고 당김을 지시하는 도선사의 워키토키가 작동을 시작한다.

제가끔 주어진 위치에서 출항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데, 어제 그제 연속으로 구름 속에 숨어있어 보이지 않았던 2000년 들어 처음 보여주는 태양이 슬그머니 떠오르더니 호미 곶의 뒷산 등성이에 걸리듯 올라서며 우리 배가 분주하게 빠져나가려고 하는 포항항의 출입구 방파제를 비춰주고 있다.


배의 브리지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덤덤한 태도로 떠나는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승한 아내를 살펴본다.

예전에 오션 코리아에 동승하고 떠나던 때는 집에 남은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온갖 집안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아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건만, 이번에는 너무나 태연하게 구경하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안달이 날 지경이다.


아직도 연결이 되는 휴대전화로 집에 전화를 거니 마침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시는 날이라 큰 애와 같이 방금 병원을 향해 집을 나가셨다는 둘째의 전언이 전해진다.


-지금 출항하고 있어, 잘 다녀올게.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엄마 바꿔주실 수 있어요?

옆에 서 있는 아내에게 전화기를 전해준다.

-어머니 구경 잘하시고, 건강하신 몸으로 집에 오세요. 참! 어머니 멋있는 선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전해준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둘째의 말이다.

-야! 인마! 네가 언제 돈을 맡겼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잘하고 있어라.

전화를 끊는 아내의 표정은 잠깐 미소를 띠며 응대하다가 담담해지는데 달포를 넘기며 집을 떠나야 하는 긴 여행에 나선 들뜬 사람의 표정 같지가 않다.


내항을 완전히 빠져나왔고 도선사도 하선을 했다.

한참을 더 달리어 드디어 호미곶을 빠져나와 대보(호미곶 ) 등대를 보며 남쪽을 향한 정침을 한 후 당직사관에게 조선을 인계해준다. 출항 작업을 안전히 끝낸 홀가분한 마음 되어 방으로 내려와서 쌓여있는 수신 서류를 모두 열람하고 조처할 수 있도록 분류 배분을 마친다.


배는 떠날 때부터 생겨있던 왼쪽으로 2도 정도 경사진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순항하는 단조로운 기관음을 조용히 내주면서 잘 달리고 있다.


발전기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발라스트 조정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상태가 며칠은 더 가야겠다. 게다가 아직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연근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갑판 청소도 안 하고 있다.


아내는 뜨개질로 자신의 반코트를 만들어 낸다고 열심히 뜨게 바늘을 움직이며 실을 풀어 가는데, 잠시 다른 일을 하여 보지 않고 있다가 얼마 후 보면 제법 두툼하니 짜진 모양새를 보이어 감탄하는 마음 절로 든다.


동승한 상황에 대해 기록을 남기자며 글을 쓰도록 권유하였는데 응할 마음은 있어 보이면서도 아직 시작을 하지 않고 있다.

뜨개질하는 것만큼 열성으로 적어 본다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갔던 재미있는 선상에서의 이야기도 나올 것 같은데...

동승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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