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에 가위질을 맡긴 사이면 이발 중 무슨 말을 못 하랴
항해 중이라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할 당직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한가한 마음 될 수 있는 토요일 오후이다.
아내는 주말의 편안함을 개의치 않고 1기사를 비롯한 3기사, 실기사 등 기관사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조발 봉사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안 그래도 이발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가족과의 재회에 빠져있던 선원들인데, 더하여 바쁜 연말 연초까지 겹쳐진 상황이라, 이발소를 찾아보지 못한 채 우리나라를 출항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그들의 고충을 덜어주겠다고 아내가 자청해서 나선 봉사였다.
사실 아내의 이발 솜씨는 학원에서 정식으로 배운 그런 솜씨가 아니라, 결혼 후 나의 머리를 깎아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애들까지 집에서 이발시키며 습득한 순전히 독학으로 이룬 솜씨이다.
그렇지만 <제 눈에 안경이라고> 나는 어느 이발소에 가서 조발한 것보다도 더 멋있게 해준다고 지금까지 믿어오는 성실한 고객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남들이 봐도 그 정도로 오랜 기간 해왔으니 이발소에서 했다고 우겨도 괜찮을 정도는 되는 모양이다.
점심 식사 후, <현재 당직시간이 아닌 사람들의 머리를 깎습니다. 이발하실 분은 이발실로 오세요.>라고 선내 방송이 나갔고 방송을 듣고 모인 사람들을 차례로 깎아주는 방식으로 아내의 주말 오후의 이발 봉사는 시작되었다.
배에서는 장기 항해 중 일 때면 서로 상대의 머리를 깎아주는 형식이거나, 누군가 솜씨를 발휘하고 싶은 사람이 나서서 이발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 역시 다른 배에서 한번 가위를 잡고 3항사의 머리를 실습 삼아 깎아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당시 삼항사는 뚜껑 머리로 변한 모습 되면서, 다시는 나한테 머리를 안 깎겠다고 웃으며 선언한 일을 당한 그 날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가위 잡는 일은 포기했지만 말이다.
머리 깎아 줄 준비를 끝낸 아내를 이발실로 데려다주면서, 잠깐 이발하는 광경을 구경하려니, 내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구나! 식의 시샘이 들면서 은근히 아내의 봉사가 아까운 마음(?)마저 품게 하기에, 허 허 허 헛웃음 날리며 자리를 떴다.
어쨌거나 배 안에서는 제일 웃어른 격인 선장의 부인이 깎아주는 이발 환경이 나타났으니 선원들은 재미와 스릴도 있었으리라.
이발이란 행위를 다른 각도로 보면,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가위로 잘라내도록 아예 타인에게 맡겨 놓고 있는 경우이니, 그런 믿음만을 본다면 허심탄회한 이야기도 절로 오갈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게 아닐까?
어쩌다 보니 이번 항차 인생의 쓰라린 한 부분을 경험한 사람들에 기관사가 많았는데, 그런 기관사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이발 자리를 마련한 것 같은 생각도 할 수 있게 일이 흘러갔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전연 하지도 않았고, 순전히 이발 봉사를 하고 싶다는 아내의 뜻을 따라 시작된 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3기사의 머리를 손질해줄 때, 아내는 선내에 소문나버린 3기사의 실연에 관한 이야기를 슬며시 끌어내어, 그가 지금 겪고 있는 마음고생을 다독여주며 좋은 상담을 해주리라 마음먹게 되었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유도하여 3기사의 사랑이야기를 이끌어 내어 들어주고는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게 잡도록 이끌어 주었다는데...
우리나라에 기항 시에는 여자의 집에 가서 기숙 할 정도의 친근감과 어른들의 묵인까지도 갖고 있던 사귐이었는데, 이번 포항 기항 시 아가씨의 일방적인 절교선언으로 헤어져야 하는 현실과 맞닥뜨려 결국 만나보지도 못한 채 출항했던 3기사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격해진 마음 때문에 지난 며칠 동안 계속 방황하며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할 정도였단다.
아내에게 자신의 파투 난 사랑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고 나니 오히려 시원해졌다며, 이제는 정리하여 굳은 마음으로 보내주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굳히라는 충고를 따르겠다는 결의까지 보여주더란다.
아내도 새삼스레 배를 타야 하는 직업을 매도하며, 그것이 흠이 되니 갈라서자며 신발 짝을 거꾸로 돌려 신는 그런 여자라면 일찌감치 헤어지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며 이발을 마쳤단다.
아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바로 뱃사람의 아내로서 30년 넘게 살아온 사람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경험이 깃든 진심의 조언이니, 삼기사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지 않았던 듯싶다.
그렇듯 토요일 오후를 여러 사람들의 머리카락 깎아주는 일에 할애해주고, 저녁 식탁에 온 아내는 가위질을 한 손이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표정만큼은 아들 같은 젊은이와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해결을 모색한 어머니 닮은 상담자의 안온한 웃음을 머금어 보이니--- 제대로의 흐뭇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
그렇게 사랑의 한 고비를 쓴 잔으로 고민했던 삼기사의 나이는 우리 둘째 보다도 서너 살이 더 어린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