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를 헤쳐나가는 시련이 크다면 그 보람도 크다.
이번 항차 포항에 기항하였을 때 그간 사귀고 있던 아가씨에게서 절교 선언을 당하게 된 3 기사가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연이 선내에 쫘악 소문으로 퍼져있다.
-아직도 그런 순정파의 총각이 있었네! 아내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데, 그렇게 변심해버린 여자를 붙잡고 매달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내가 그 아가씨를 한번 보았는데, 그런 여자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리 목을 매다는 고?
-여자가 너무 표독스럽게 생겨서 첫인상이 안 좋아, 이 기회에 잘됐구나 하고 정리해라!
-너를 좋다고 하는 간호사 아가씨가 훨씬 나아 보이더라. 차라리 그 아가씨와 잘 해봐라.
남의 사정이니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마구 쏟아져 나오며 충고도 하고 도움말도 보태지만 사랑이란 게 그렇게 제 편 한대로 이성적이게 판단하여 쉽게 맺고 풀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사랑이겠어요.
속 아픔을 당하면서도, 잊지 못하며 괴로워하기에 그 안에서 성숙하는, 그런 곳에 사랑의 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기사는 그렇게 심하게 앓고 있었다.
아내는 세상을 먼저 살아왔고 사랑도 해봤던 인생의 선배로서 3 기사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일조를 보탤 요량으로 그를 만날 기회를 알아보았단다.
자신도 세 아들의 어머니로서 3 기사의 현실이 결코 남의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이겠지만, 할 일 없이 그 시간을 보낸다면 그 과정이 너무 힘들 수도 있으니, 그 마음을 이성적인 판단에 비중을 실어주게 다독이며 현명하게 넘기도록 안내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런 아픔을 감수하며, 생을 관조하는 경지에 들 때, 인간은 성숙되는 것이고, 먼 훗날 오늘의 아픔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세월 또한 생의 여정이라고 알려줄 테니, 그동안에 다른 이상한 일이나 생각은 하지 않는지 이 며칠간 잘 관찰하며 돌봐주라는 부탁까지 해온다.
더하여 아내는 3 기사의 이번 이별에는 납득하기 싫은 사항이 있다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현실의 이기심들이 아주 혐오스럽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삼 기사는 우리나라에 입항하면 자신의 부모님이 계신 집에는 가지 못할지라도(집이 항구와는 먼 내륙지방이긴 하지만), 그 아가씨 집에는 꼭 찾아가 인사를 했고, 심지어는 그 집에서 사위 대접을 받으며 잠도 자고 밥도 먹으며, 다시 배로 왔다가 출항하는 생활도 그간에는 여러 번 있었다는 거다.
그때마다, 자신이 외지에서 받는 수당을 모아 필요한 물건을 샀었고, 그 아가씨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생활은 처음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있어 왔는데, 이번 입항 시에도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는 데 만나자마자, 결혼할 사람이 생겼으니, 그만 교제하자는 청천벽력 같은 말과 함께 만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일언지하에 받았다니, 그 속 터지는 분통과 쓴맛이야 오죽했을까?
모든 것(결혼)을 허락해준 것 같은 생활로 묵인해 오다가, 자신들의 판단에 더 나은 자리로 나타난 새 인연에 너무 쉽게 넘어간 그들 모녀의 행각은 이 세상살이에 닳고 닳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속물들의 대표적인 행위로 그냥 느껴진다.
그런 점을 강조하며,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끝난 게 오히려 3 기사에게는 잘 된 일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단다.
더 많은 정이 쌓이고 아이들도 생긴 결혼 생활을 하다가, 마누라가 다른 남자에 빠지는 일을 만들어, 자네가 한참 항해 중일 때, 자네 속을 뒤집는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나? 생각해 보게나!
-그들 모녀는 능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모범 답안을 이번에 자네한테 보인 것이야,
-자네가 계속 흥분하여 그런 관점을 안 보고 넘긴다면 그 게 더욱 큰 자네의 불행이 되는 거지,
-지금은 세상이 모두 까맣게 보이고, 슬픔이 란 슬픔은 모두 자네한테만 있는 것 같아도,
-시간만 좀 더 지나면 다 잊히는, 아니 잊어야 하는, 망각 속의 추억이 되는 거지.
-차라리 그 추억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지금 그대로 보내버려, 아름다운 모습일 때~
-망각이란 그렇듯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만드는 일종의 보호막인 것이야.
-괴로움과 슬픔이 크면 클수록, 망각 속의 그 추억도 그만큼 크고 아름다워지는 거지.
-중요한 건, 세상에 많은 남자와 여자가 있어 언젠가는 서로 짝을 이룰 수 있는 건 데,
-지금의 여자는 자네 짝이 되면, <아니함만 못 하리라>로 될 게, 불을 보듯 뻔해 보여,
-자네의 포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거지. 자 이쯤에서 잊어버리도록 하게나.
-더 이상 그녀를 향한 집착은 끊도록 하게나. 집착은 스스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큰 병이라네. 그 병을 이기고 나면 인생에 필요한 큰 면역은 절로 갖게 되는 거지.
아내가 3 기사와 개인적으로 면담하며(이발을 해주면서) 이야기해 준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의 사연임은 나중 아내와 둘이 나눴든 대화로 알 수 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
-당신이 나하고 사귈 때는 그런 적이 없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3기사의 상황을 그리도 잘 아는 거지?
짓궂은 질문을 던져본다.
아내는 나를 첫 번째 사귄 남자로 만나 그대로 결혼한 거라 이야기해 왔고, 나도 그 말을 진실로 믿고 있지만, 어떻게 3 기사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 같은 구구절절 옳은 말로 충고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시쳇말로 새롭게 아내를 알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당신은 내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 직접 경험한 것 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달이면 우리의 결혼도 31 년째가 되는데, 그간 보아 온 남의 일만으로도 얼마든지...
-아아~ 예에, 알았어요. 나도 당신 카운슬링에 전적으로 동감한답니다.
-괜히 둘만 있으니, 당신하고 옛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저 한번 해 봤던 소리랍니다.
우리 부부의 동승 기간은 이렇게 쇠로 만들어진 배라는 공간 속에서 남의 이야기로 우리를 뒤돌아 보는 시간도 만들며 차츰 어우러져가는데, 배는 결코 둥그런 수평선의 중심을 헤어나질 못하면서도, 제 본연의 임무인 달리기를 위해 몸체를 스을슬 흔들며 앞으로 빠져나가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기와 어울려 나타난 무지개의 채색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여기는 태평양의 한가운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