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무풍지대(남, 북위 10도 내의 해역)를 남행하다.
포항을 떠난 출항이 벌써 일주일이 되어 오는데, 아직도 육지를 만나보지 못했고, 지나치는 배도 없다며, 푸념 같이 이야기하는 아내의 관심을 채워주기 위한 하늘의 배려이었을까?
아직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VHF 전화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것도 우리말로 나오는데 발음에 약간의 이상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필리핀 선원들이 타고 있는 속칭 수출선( 송출 선원들로 짜인 선박)이 부근에 나타났다는 짐작을 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VHF 전화를 심심풀이를 해결하는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마구 사용하는 경향이 심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말을 하여 근처의 항해하는 한국 배를 은근히 호출하는 일도 벌이곤 한다.
지금 흘러나온 그 말-한국 배 있습니까?-라는 말은 아마도 그들이 한국 배에 선원 수출 와서 승선했을 때 배웠던 것일 게다.
레이더의 화면을 찬찬히 살펴본다. 스코프 상 선수 좌현에 흰 반점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그 선박임을 확인하며 그 방향의 수평선을 육안으로 열심히 살폈고, 아침 열 시가 되어서야 우리 배와 반대로 지나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해치(HATCH)가 일곱 개짜리 인 파나 막스 형(*1) 벌커(*2)로서, 굴뚝에 칠 해진 흰색 바탕에 두 줄 붉은색의 나란한 줄을 두른 회사 표지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일본 회사인 니혼 유센(NYK)의 선박이다.
아내더러 쌍안경으로 살피며 해치의 수를 세어 일곱 개인 것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예전 캐나다를 갈 때 동승했었던 오션 코리아호와 비슷한 크기의 선박이며 일본의 배라고 설명해준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해치(선창의 창구)가 아홉 개인 Capesize(*3)의 선박이며 살물선을 크기 별로 통칭하는 명칭에 handysize(*4)라는 것도 있다고 덧붙여 알려준다.
이어 10 시 30분쯤. 우리 배가 적도를 북에서 남으로 통과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항해일지에 적도를 통과했다는 시간과 경도를 적어 넣는다.
처음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 적도의 이야기를 해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도가 다른 바다와 어떻게 다르게 표시되어 있어서 적도라고 부르는지를 묻는 호기심을 제일 먼저 보인다.
그래서 그곳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그를 표시하는 부표라도 띄어져 있다고 하면 긴가 민가 하는 표정들을 짓지만, 어느새 한쪽으로 슬그머니 물러나서 쌍안경을 들어 살피는 모습들을 보이곤 한다.
만약 설명하는 사람이 시치미 뚝 떼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말들을 했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믿게 되어 그 빨간 줄로 표시된 적도를 남 먼저 찾아보려고, 저마다 쌍안경을 먼저 들려고 은근히 경쟁하는 상황도 만날 수 있다.
전에 처음으로 아내가 동승하였을 때에도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아내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오늘 적도를 통과한다니 새삼스레 적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보는 의문을 보여준다.
아마도 나에게 장난을 걸어 보려는 아내의 개구쟁이 기질의 발동으로 보여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못 들은 채 넘겨 버린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시들해진 아내는 갑자기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자고 조른다. 막내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 준다.
막내의 목소리에 기쁘게 응답하며 근황을 주고받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동안 무심한 척, 아닌 척하며 지내왔던 게 저 사람인가 싶게 달라져 있다.
막내아들이란 유별난 관계라서 더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반가움에 호들갑을 떠는 어투에서 어쩔 수 없는 한국 어머니의 전형을 찾아보고 있다.
사실 어제는 집에 전화 걸어 어머니나 큰 아들애와의 통화를 했는데, 그때 막내아들과 통화 못함을 섭섭하게 여기더니 오늘은 기어이 막내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한 것이다.
직장 관계로 우리가 집으로 전화를 거는 시간에 막내는 집에 없으므로, 그 애와의 통화는 어쩔 수 없이 직접 거는 수밖에 없어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는 둘째 아들 역시 집을 떠나 있어 통화를 못하고 있으니 그 애한테도 걸어야겠다는 미안한 생각이 드는지 내일은 둘째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 보겠다고 한다.
배는 남반구로 들어서서도 더욱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며 잘도 달리고 있다. 아직은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10도씩의 대역 내를 지나고 있으니 조용할 수밖에 없겠지. 그 해역을 적도 무풍지대라고 이르고 있으니 말이다.
주*1 : Panamax Bulker, 파나마 운하의 통행이 가능한 최대 폭을 가진 선박을 말하며 DWT 65,000-73,000 정도(평균 70,000 DWT 내외)로, 배의 폭(Beam) 최대 허용치는 32.3m이며 흘수(Draft: 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 허용치는 최대 12.04m이다.
주*2 : Bulker, (Bulk Carrier) 살물선(撒物船) 곡물이나 광석 등 포장하지 않은 산적화물(散積貨物)을 싣는 화물선.
주*3 : Capesize Bulker. 파나마 운하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에는 너무 커서 대양 이동시 남미 남단 cape horn이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아서 운항해야 하는 선박으로 DWT 12만 톤-16만 톤 정도 되는 선박임.
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해안에 있는 석탄수출항 Richards Bay에 입항 가능한 최대 선형을 말함. 종래 동 항구는 입·출항 선박에 대해 길이 314m 이하, 폭 47.25m 이하, 흘수 17.1m 이하의 제한이 있었으나, 현재는 길이와 폭의 제한이 없어지고 흘수도 18.1m로 완화되었고, 상기 규격 제한 내의 재화 중량톤 15만 톤 정도의 광탄선을 Capesize라고 부르고 있음.
주*4 : Handysize bulk carrier. 살물선으로는 소형에 속하는 DWT 2.5 ~ 4.5만 급의 선박.
DWT(Deadweight)는 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를 나타내는 재화중량으로, 이는 화물, 승객·선원과 그들의 소지품, 연료, 식량, 음료수 등이 모두 포함된 중량이다.
순전히 배 자체만의 무게는 LWT(Light Weight), 즉 경하(經荷) 중량이라고 하며 이는 조선소에서 건조된 배가 선주에게 인도될 때의 배 무게로, 엔진 시동을 걸 수 있는 최소량의 연료와 윤활유, 냉각수, 법정 비품 등이 포함된 중량입니다.
따라서 빈 배 무게인 LWT와 가득 실은 짐 무게 DWT를 합치면 배 전체의 무게가 됩니다
이렇게 더해진 배 전체의 무게를 배수톤수(Displacement Ton)라 하며 같은 배를 놓고 볼 때 가장 숫자가 많게 나타나는 톤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