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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빗물에 빨래를 하다.

빨래하기에 더없이 좋은 빗물

by 전희태


F6(6134)1.jpg 윙 브리지 갑판의 모습. 손으로잡게 되어있는 스톰레일과 위쪽 톱브리지 갑판에서 물이 흘러 내리는 Scupper Pipe 도 보인다.



에어컨디셔너에 작은 고장이 생겨 찬 공기의 실내 유입이 막혀버렸다. 절로 솟아나는 땀과 함께 후덥지근한 실내 온도는 못 말리게 계속 오르고 있다. 끈적거리는 더위를 피하여 대기의 작은 바람이라도 만나볼까 싶어 브리지로 올라간다.


그렇게 찾은 브리지 창밖으론 하늘과 수평선이 모두 회색으로 물들어 가면서, 오른쪽 가까운 바다에서는 비를 몰아가는 검은 구름이 점점 다가서면서 몇 방울의 빗방울과 함께 동행해 오는 찬 기운의 시원함을 선물 삼아 던져주고 있다.


아직은 배안에서 한 곳에 가만히 머무는 일에 익숙지 못한 아내가 브리지에 서있는 일이 아무래도 맘에 안 드는지 걸레로 쓰는 수건을 찾아내더니 빗방울로 얼룩져 보이는 창 앞의 유리를 닦아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검게 묻어난 때를 빨아내기 위하여 세면대 쪽으로 가려다가, 이미 쏟아지기 시작한 소나기로 흥건히 젖어 가는 브리지 바깥쪽으로 눈길을 돌려준다.


-아, 참 저기서 세탁하면 좋겠군!

톱 브리지 위의 갑판(플라잉 데크)에 고여지는 빗물이 급하게 윙 브리지 갑판으로 흘러내리며 내는 쿨럭이는 물소리가 스커퍼(SCUPPER) 파이프 끝단 쪽에서 들린다.


키 넘은 높이의 작은 낙차를 가진 맑은 물이 떨어져 내리는 파이프 끝단을 마치 산골짜기의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이라도 되는 양, 아내는 주저 없이 그 앞으로 다가앉더니 걸레 수건을 빗물에 담그며 치대기 시작하는데 비스듬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몸을 적시려 달려들고 있다.


마침 브리지에 세탁비누는 없고 세면 비누만 있었기에 할 수 없이 그 세수 비누를 칠해가며 열심히 비벼주니 묻어있던 때가 어느새 반쯤 씻겨나가며 향긋한 화장비누 냄새마저 풍겨주니 걸레가 아니라 그냥 수건이라 해도 괜찮겠다.


잠시 후 비가 개인 다면 금세 마를 것을 기대하며 탁탁 털더니, 비스듬히 내리고 있는 빗줄기가 가려지는 쪽의 스톰 레일(STORM RAIL. 황천으로 기우뚱거리는 선체 운동이 심할 때 보행자의 평형을 유지시키도록 손으로 잡을 수 있게 통로 벽에 부착하여 연결된 긴 막대형의 손잡이)을 찾아 그 위에 걸쳐서 널어놓는다.


아내는 작은 실개천에서 깨끗하게 빨래를 해낸 것 같은 상큼한 기분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맨손에 팔뚝까지 걷어 부친 채 뒤치다꺼리를 하는 얼굴에 흡족한 미소마저 띠고 있다.


-물이 시원해서 좋지요?

하며 묻는 나에게

-아니요, 그렇게 시원하지는 않지만, 안의 수돗물보다는 감촉이 훨씬 좋은데요.

어쩐 일일까? 그 물에 손을 담가보니 생각보다 온기가 먼저 느껴진다. 그러나 매끄러운 느낌도 참 좋다.


열대지방에서는 소나기성의 굵게 내리는 빗물 속에서, 더위와 땀을 털어내려고 옷을 벗고 비누칠을 한 후 그 빗물을 맞으며 샤워를 할 경우, 씻겨지는 감촉은 매끄럽고 아주 상쾌하지만, 너무 추워서 턱이 덜덜 떨리는 찬기운 때문에 십중팔구는 감기에 걸리게 된다. 그런 경험으로 당연히 찰 것이라 예상하고 담가본 손인데 따스할 정도로 온기를 느낀 것이다.


비오기 전인 오전 내내 태양 볕으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던 톱 브리지 갑판(철판) 위에 떨어진 빗방울들이 자동적으로 수온이 오르면서 약간의 미지근한 기운을 남겨준 때문이다.


조금 더 비가 길게 와서 갑판이 완전히 식었다면 아마도 시원한 물이 될 것이고, 에어컨이 잠시 멈춘 배 안 역시 많이 시원해질 것인데 생각하여, 좀 더 비가 퍼부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수 쪽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쪽은 다시 밝은 기운이 구름을 밀어주는 모습인데, 방금 전 페인트를 칠하는 과업을 하려다가 비 때문에 중단한 1번 창 해치 커버 위에서 철수한 갑판 부원들이 급하게 뛰어서 리빙 쿼터로 들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지나가는 소나기로서 이제 곧 비가 그칠 것을 예상하며 걸레 빨래를 끝낸 아내와 같이 방으로 되돌아오려는데,

-에어컨디셔너를 고쳐 다시 가동 중이니, 환기를 위해 열어 주었던 선외로 통하는 모든 문은 닫아주세요.

바람직한 선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닫아주고 송풍관은 최대로 열어주며 방안으로 시원한 공기가 많이 유입되도록 하는데, 고장 났던 에어컨디셔너를 고치느라 감독하며 애를 썼던 기관장이 땀에 흠뻑 젖은 작업복 차림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기관장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데,

-에어컨 고장으로 더워서 고생하셨죠? 이젠 괜찮을 겁니다.

더워있는 모습을 넘어선 기관장의 시원한 인사가 되돌아온다.


나는 그저 그의 수고를 알고 있다는 표시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데, 어느새 시원한 에어컨디셔너의 공기가 방안 가득 쾌적함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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