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HF 전화로 달래 보는 인연의 이야기들
-오션 마스터호 기관장님께서 선장님을 바꿔 달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호주를 향해 항해하고 있는 대우 스피리트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오션 마스터호에서 전화 연락이 왔다고 브리지의 당직자가 알려 왔다.
마침 3항사의 식사시간 교대를 받고 내려와 같이 식탁에 앉아있던 일항사가,
-앞에 두 척의 배가 나타나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오션 마스터 호인 모양입니다. 한다.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브리지로 올라갔다.
-오션 마스터호, 오션 마스터호, 여기는 대우 스피리트호 감도 있습니까?
VHF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부르자마자,
-대우 스피리트호, 오션 마스터호입니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Y기관장의 목소리가 즉시 응답하고 나온다.
이렇게 대양에서 서로 지나쳐가는 때를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당사자들인 Y기관장과 나는 바로 그 배 오션 마스터호에서 같이 책임 선, 기장으로 근무를 하다가 지난해 연가 때 같이 내렸던 중고등학교와 대학 모두에 걸친 이중의 선후배 사이로 내가 3년 선배이다.
나는 지금 이 배 대우 스피리트호의 새로운 책임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그는 예전에 책임 맡았던 그 배 오션 마스터호에 다시 승선하고 있는 모양이다.
-저는 이 배 릴리프 기관장으로 지난 12월에 탔습니다.
하는 말을 들으며 아하 그렇게 된 것이구나! 하는 마음에, 혹시 그가 다시 그 배의 책임 기관장으로 탄 것은 아닌가 하던 의구심은 사라졌다.
만약 그런 조치로 다시 승선한 경우였다면, 별로 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그 배에서 책임 선장의 자리를 나에게 내놓게 했던 육상의 담당 직원들에게 많은 유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형수님도 같이 승선하고 나오셨다면서요? 하는 말에
-그래, 이번 항차 뉴캐슬에 간다고 해서 마음먹고 동승했는데, 행선지가 갑자기 바뀌어서 김새게 되었어!
하며 소식도 참 빠르게 들었구나 싶어,
-어떻게 집사람이 동승한 이야기를 알게 된 거야?
물어본다.
-뉴캐슬에 있을 때, 선식의 미스터 J가 그러더군요.
원래 우리 배가 뉴캐슬에 간다던 예정이었으니, 자신의 영업 정보상 선장 가족의 동승도 미리 알고 있던 이야기였으니 그리 전해진 모양이다.
-사위가 다쳐서 치료를 받는다더니 이제 괜찮은 거야?
이번엔 내가 묻는다.
-작년 9월에 무릎을 다쳐 독일에 가서 수술하고 지금은 재활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어요.
그의 큰사위가 유명한 축구선수 날쌘돌이 S 선수이기에 물어본 안부였다. 더하여 그 배에 승선 중인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부탁하면서, 일단 전화는 서로의 안전항해를 위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한참만에 끝내었다.
저녁식사의 뒤치다꺼리를 도와주고 좀 늦게 브리지로 올라온 아내를 위해 이번에는 내가 그 배로 연락을 취하여 Y기관장을 찾으니, 브리지를 떠나 밑에 내려가 쉬고 있단다.
그래도 말이 나온 김에 기관장을 불러 주도록 부탁하였고, 이윽고 다시 전화 앞에 나타난 그를 확인한 후 아내에게 전화기를 넘기어 통화하도록 연결해 주었다.
아내는 갑자기 전화기를 건네받으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당황한 기분인 것 같았고, 상대방 Y기관장도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아무래도 어색한 기운을 느끼는 모양이다.
아차!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나 혼자의 순간적인 기분에 치우친 판단으로 두 사람에게 갑작스레 통화를 강요한 것같이 되어버린 묘한 상황에 후회하는 기분이 들어 나 역시 머쓱하니 되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쑥스러움을 깔고서 겉도는 이야기를 더듬거리듯 주고받다가, 아무래도 VHF 전화기 사용이 익숙하지 못한 아내의 통화 방식에 Y기관장이 적당히 안부를 보내주더니, 후에 육상에서 연락을 하여 가족과 같이 만나자는 약속을 만들어내며 통화를 끝내고 있다.
어색했던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에 전화기를 걸어 놓는 아내를 얼른 이끌어 쌍안경을 들게 하여 어둠 속에서 점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그 배를 보게 한다.
이미 어둠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항해등과 약간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의 윤곽으로 배의 형체를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저 배가 지나간 4년- 배를 만들면서부터, 그리고 처녀항해와 이어지는 승선기간 모두를 책임 선장으로 근무하는 인연을 맺어-, 대양에서 만나는 타선들에게 내가 보여준 적이 있든 배, 오션 마스터호 바로 그 배이구나!
언젠가 지금 이 배 대우 스피리트호와 오늘 같이 만나서 지나치면서 통화를 한 때가 있었음도 떠올려진다.
그때와 달리 서로의 자리가 반대로 바뀐 상태로 서로를 쳐다보는 입장이 된 점에 묘한 마음의 감회를 담으며, 괜히 옆에 있는 아내를 부추기는 말로 이야기를 이어주며 아직까지 남아있던 무색함을 얼버무린다.
-저 배에 방선도 했었고, 어쩌면 동승도 했을 뻔한 배였는데 저렇게 보게 되니 어떤 기분이 들어요?
-낮에 환 할 때 보았으면 좀 더 나았을 텐데, 하여간 묘한 기분이네요.
아내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서로의 옆구리를 가까이 지나치며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불빛까지 감지할 무렵 내가 보내준 장성 일발의 기적소리에 응답한, 그 배의 목이 쉰 것 같은 썩심 한 기적소리를 들으며, 아내는 어둠에 섞여가는 그 배의 그림자를 좀 더 가까이하려는 듯 윙 브리지로 나간다.
그리고 이미 확인하기 어려운 어둠 속이지만, 두 팔을 휘젓는 모습을 그 배를 향해 보내 준다.
이제는 우리 배의 뒤쪽으로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실루엣을 남기며, 그 배의 선미등만이 그나마 환하게 남겨 보이고 있다.
그렇게 서로의 질긴 인연의 사슬 한 끝 자락을 어루만지며,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모습에 아쉬움을 담아 보내며, 이제는 자신들의 앞쪽 방향만을 우선적으로 살피며 묵묵히 제 할 일로 돌아가야 했던 곳.
여기는 솔로몬 해의 마지막 남쪽 끝자락 입구인 조마드 수로까지는 아직도 약 6시간 정도 더 달려야 할 거리를 남겨두고 있는 솔로몬 해의 남쪽 해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