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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저 석양을

하루의 마감이 또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주는

by 전희태


Ȳȥ02(8359)1.jpg 황혼을 맞이 한 수평선


헬리콥터가 본선으로 날아왔다. HYDROGAPHER PASSAGE 의 통과를 도와줄 도선사를 우리 배로 실어다 주려고 찾아온 것이다.


7 번창 해치커버 위의 헬리포트에 내린 도선사를 브리지에서 맞이 한 후, 본선의 움직임 상황에 대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의문사항에 대한 대답도 해준 후, 본선 지휘에서 한시적으로 빗겨서기를 한다.


실제적으로 도선사가 승선하면 그가 관장하고 있는 해역 내에서 본선 움직임은 본선 선장에 앞서 그의 지휘 아래 드는 셈이지만, 그렇더라도 본선의 지휘 결과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언제나 선장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선사가 행하는 조타, 기관사용 등의 지휘 행위에 대해 선장은 항상 감시 감독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도선사의 지휘 아래 선박 사고라도 나게 될 경우, 이런 관례는 선장에게 골치 아픈 짐을 지워주는 일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래도 그 수로에서는 도선사가 전문인이기 때문에 모든 선장은 자신의 지휘권을 한시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이런 관계를 가지고 본선을 찾아온 도선사에게 본선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며 그에게 지휘를 일임한 후, 내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수화기를 통해 울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기다린다. 이윽고 수화기 드는 소리가 나더니,

-여보세요, 하고

응답하는 음성이 방에 있던 아내로부터 전해왔다.

-여보, 조금 있으면 해가 지려고 해요. 얼른 브리지로 올라와 보세요. 하는

말로 어쩌다 오랜만에 볼 수 있게 된, 지는 해가 만들어 주는 석양의 경치를 보자고 청했다.

-알았어요. 곧 올라가겠어요.


수화기를 전화기 위에 다시 놓아주며, 이제 정식으로 저녁노을의 모습을 보기 위해 우현 윙 브리지 갑판으로 쌍안경을 들고나갔다.


좀 전 헬기를 타고 날아온 도선사는 어둠이 점점 접근하려는 선교 안에서 본선을 무사히 내항으로 데려가기 위한 준비로 이것저것 확인하고 있다.


둥그런 모습의 태양은 주위에 있는 구름을 층 따라 약간씩 다른 색으로 묶어주며, 오늘을 마감하려는 석양 행사로 바쁘게 모습을 변신해가며, 수평선 아래를 향해 한창 낙하 중이다.

아직도 맨눈으로 보기에는 좀 밝은 느낌에 흘끔흘끔 곁눈질로 점점 고도를 낮추는 해의 붉은 모습을 훔치듯 보는데 전화로 초대한 아내가 브리지에 나타난다.


-빨리 여기로 나와 보세요. 지금 한창 진행 중이에요.

붉은 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을 들어 부르며 말한다.


수평선의 윗부분에 걸쳐 있는 구름 사이로 숨어 들어가는 붉은 해를 안타까운 맘으로 쌍안경까지 동원하여 확인해보며, 구름아 어서 벗겨져 다오! 간절히 간원하는 심정이다.

틈새를 남긴 구름 사이로 붉은 해의 부분이 들락거리듯 흘러내리니 온통 붉은 때깔의 황혼 기운은 더욱 짙게 주위에 있는 구름을 물들여 준다.

구름에서 조금 벗겨져 걸렸던 태양의 테두리 하단이 어느새 무지러지듯 쓱쓱 수평선 아래로 스며들듯이 빠르게 사라져 가면서 오늘 낮의 마감을 시작한다.


거의 눈 깜빡할 새 같은 짧은 순간으로 마지막 태양이 바쁘게 빠져 버린 수평선 뒤쪽에서, 새롭게 쏘아진 몇 개의 화전(火箭) 꼬리 같은 빛줄기가 수평선을 가르며 중천 하늘 쪽으로 부채 살처럼 뻗혀 나온다.


그렇게 바쁘게 설계된, 태양이 서녘을 기리어 빚어낸 행위예술 같은 황혼의 출현은, 마치 30 여분 전 외해 도선사를 태우고 나타났던 헬기가 도선사를 내려주고 금세 붕 떠서 날아가 버린 모습과 어쭙잖게 닮은 분주함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때 떠나 간 헬리콥터는 그저 멀리 가버린 것 일뿐. 아무런 흔적도 여운도 남겨주지 못했지만, 지고 난 다음의 해는 오히려 서편 하늘과 구름을 더욱 붉게 타오르는 황혼의 약속으로 채색하여, 우리의 마음을 서러움의 여운 속으로 고즈넉이 몰아넣으려는 자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 가진 상황은, 결국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일에 비해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일이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받으며 궁극적으론 어둠이 빚어내 주는 씁쓸함 속으로 점 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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