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의 좌석

선장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by 전희태
PB049692.jpg 경복궁의 옥좌 모습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이렇게 노래하는 대중가요도 있지만, 현실에서 의자란 주인이 따로 있는 물건이 아닌 편리에 따라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가구로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의 상징이거나 관행으로 배타적으로 특정인에게만 주어지거나 정해진 자리도 있는 바,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는 자리가 임금님이 앉는 옥좌일 것이고 그 외에 세상에서 특별히 떠 올릴 수 있는 자리는 더는 없어 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선박에서는 본선의 선장만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좌석(의자)이 관습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본선의 승조원이거나 본선을 방문하는 사람 그 누구도 그 자리에는 앉지 않는 독특한 전통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좌석은 선박의 시니어 사관들의 싸롱 식탁에서 본선 선장의 좌석을 중심으로 식탁이 꾸미어지는 것으로 설사 높은 자리의 인사가 그 식탁에 초대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선장의 좌석만큼은 양보되지 않는 범접할 수 없는 정해진 자리로서 나머지 사람들의 좌석배치도 그에 준하여 시행되는 것이다. 이는 하루 이틀에 생겨난 관습도 아니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도 아니다.


이런 전통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며 생활하던 중 호주 기항 중에 좀 난처한 경우를 당했던 적이 한번 있었다.

호주 뉴캐슬 항에는 그곳에 기항하는 한국 선원들을 상대로 선물 센터를 경영하는 C 씨라는 이민 교포가 있다. 

나와는 비슷한 연배이고 알고 지낸 지도 이미 25 년을 훨씬 지난 사이지만 어딘가 거리감을 갖고 이야기하며 대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때가 있는 것은, 그가 우리 선원들을 상대하여 장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나 나나 모두 옛날 친구 같은 마음으로 평교로 트고 지내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그런 사이 이기도 했다.


단지 그의 생활 태도가 너무 술을 좋아해서 현지에서 취중 운전으로 운전면허를 취소당하기도 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음이 좀 민망한 일이며, 내가 경계하는 일이었다.


그렇건만 아직도 그 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증세를 여전히 갖고 있어, 입항한 날 처음 찾아온 모습을 보면 이미 술 한잔을 걸친 채 인사하고 다니는 걸 목격하여 핀잔주게 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캥거루 가죽을 이어서 만든 여자용 허드레 백을 한 개 사려고, 어제 그의 가게에 들렀더니 그 물건이 다 떨어져 없다면서 오늘쯤은 구할 수 있겠다고 했었다.


오후에 배로 찾아와서는 그 물건이 우리가 출항한 후인 다음 주 월요일이나 되어야 도착하겠다며 그때 집으로 부쳐줄 테니 주소나 알려 달라는 걸, 입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이야길 하기에 기분이 좀 상해서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거절로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통로를 따라 같이 걸으면서 이어지던 대화가 자연스레 사관 식당 앞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발걸음이 그냥 살롱 식당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을 때, 이 친구 식탁의 의자를 하나 빼어내더니 별생각 없이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데 하필이면 그 의자가 이 배에서는 아무나 함부로 앉을 수 없는 그 신성한(?) 선장만이 사용하는 의자이다.


선원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를 30년 가까이했으면서도, 아직까지 본선의 식탁에서의 선장 좌석에 아무나 앉을 수 없다는 배 안에서의 고유한 불문율의 관습을 그는 모른 단 말인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생활해 온 지금까지의 내 일상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 한 착각에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다.


그냥 넘어가자니 아무래도 그 관습이 맘에 걸리고, 더하여 마치 무슨 나쁜 일이 생기는 걸 암시하려고 나타난 일이라도 되는 양 여겨지는 마음에. 그냥 넘어가자는 다른 한편의 생각을 무시하고,

-그 자리는 선장의 자리잖아?

라는 간접적인 통보로 그가 선박에서의 관습을 상기하도록 유도하여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주기를 바랐다.

-선장의 자리에 조금 앉으면 안 되나?

하며 그는 오히려 일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듯 좀 더 미적거리며 그냥 앉아 있어 나의 마음을 씁쓸하니 계면쩍게 만들고 있다.


더 이상 두고 보기가 뭣해, 그냥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제스처를 썼다. 자연히 나를 따라나서게 만들어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방안을 사용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마치 길을 가다가 무뢰한이나 불량배에게 야유를 당하거나, 손찌검이라도 받은 것 같은 불쾌감이 순간적으로 들면서, 이 친구 그런 예의도 모르면서 선원들을 상대하여 장사를 해왔나? 하는 생각이 또 들어선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는 내가 친한 사람이라 허물이 없다는 뜻에서 그런 행동을 보여준 것으로 여겨지는 마음도 들기에, 너무 그를 탓하는 마음은 갖지 않기로 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 해프닝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 다행으로 여기어 그 정도 선에서 그냥 묻어 주기로 하며 그를 배웅해주었다.


많은 에피소드가 회자(膾炙)하는 선장의 좌석이다. 상대가 그 선박의 선주이더라도 그 자리만큼은 선장에게 절대적으로 양보하고, 자신은 다른 자리에 앉아주는 예의가 존재하는 그런 자리가 선장의 자리인 것이다.


영화 속의 여객선에서 정장을 한 선장이 역시 정장을 한 사람들과 앉아서 식사하는 식탁의 호스트 자리가 바로 선장의 좌석이고, 그곳에 다른 사람은 앉을 수 없는 불문율의 관습이 배 안의 룰로 전해 오고있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선장의 파워나 지위가 옛날 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전해지는 이런 풍습은 선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지켜주고 유지해 나아가야 할 선장의 권위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남겨야 할 일이 아닐까?


스스로 자존 하는 의미에서라도 선장의 좌석은 배가 있는 한은 꼭 지켜 받고 싶은 선장들의 자존심과도 통하는 일이라 이야기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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