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출항
낮에는 이렇게 환한 볼품이 있지만 한밤중의 출항에는 시내의 불빛에 어울린 도등의 등불을 찾아가며 빠져나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곳이다.
새벽 0시 45분. 부두에 배를 연결하여 붙잡고 있던 모든 계류삭(Shore Line)이 걷어 들여진다.
이어 선미 쪽에서 기관을 쓸 수 있게끔 모든 계류삭이 클리어 되었다는 보고를 2 항사가 해왔다.
조금 전까지도 바쁘게 선적 작업을 하고 있어서, 미리 올라 온 파이로트는 브리지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작업도 끝나고 서류 정리도 마감되었다는 전달을 받으며 출항을 위한 준비를 바쁘게 서둘러 주니, 30분 이상의 시간이 단축된 출항이 이루어졌다.
꽁무니(선미)를 부두에서 떼어내고 선수(船首)도 출항 침로에 올려놓으며, 본 항로로 들어서니 저 앞쪽 해안가와 육지 안에 거리를 두고 다른 높이와 색깔로 설비된 도등(導燈. Leading Light. 주*1)의 빛깔들이 선수의 움직임에 따라 녹색과 적색을 오가지만 밝게 어둠 속의 항로를 찾아내 주도록 도와주고 있다.
도등의 등불 빛 두 개가 선수에서 수직으로 초록색깔로 띄워주는 침로를 택하며, 배는 조용히 항내를 헤엄치듯 빠져나오고 있다.
<대전 발 0시 50분>이란 열차와 이별의 이야기를 노래한 유행가도 있었지만, 그에 비견되는 이런 우리들의 한 밤중 출항은 모든 선원들의 몸에 피곤함을 덕지덕지 붙여주며, 체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 같이 보이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항로의 중간쯤에 있는, 크게 90도 이상 돌아야 하는 해역을 대각도로 좌 전타시켜서 무사히 돌아서면서 다음 침로의 도등 불빛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침로에 들어섰음을 겨냥한다.
어느덧 도선사를 하선시키고 항구 입구 방파제를 빠져나온다. 항해당직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빨리 황천에 대비한 뒤처리를 끝내준 후에 해산하도록 지시한다.
이윽고 선수부에서 뒤처리를 마치고 해산한 선수부 부원들이 거주구를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다. 발 앞을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이 걸음 따라 흔들리다가, 선수 쪽 수평선을 열심히 경계하여 보고 있는 브리지 항해 당직자들의 눈을 찌르듯 지나치게 해서 한 번씩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 준다.
갑판상 작업자들이 모두 철수한 조용해진 갑판 위로 규칙적으로 울러 퍼지는 기관 소리가 자장가 되어 줄 무렵 선내는 어느새 조용해지며 한 번씩 다가서는 잔 파도에 선체마저 수굿하니 몸을 비벼주듯 흔들어 주는 속으로 밤은 깊어만 간다.
그렇게 밤이 지났다.
소전투라도치르듯 바삐 지나치는 출항 속이었지만 그래도 서너 시간이나마 쪽잠들은 잤으니 아침이 되었으면 일어나 줄 만도 한데, 워낙 피곤이 겹쳐서인지 아침 TBM 미팅 시간에 내려가 보니, 엄밀하게는 본선과는 큰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실항사 만이 오도카니 앉아서 미팅 참석자들이 와주기를 기다리고있는 한산한 일과 시작 시간을 보이고 있다.
그 애는 실습을 위해 본선에 찾아온 학생이니 엄격하게 구분한다면 본선 선원은 아니고 단지 자신의 실습을 위해 승선하는 입장인데, 그렇게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실제로 본선의 제반 운항의 일을 오늘 당장 해나가야 할 선원들은 아침 식사도 걸은 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알찬 실습을 위해서는 실항사의 그런 모습도 보기 좋고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본선을 이끌어 가야 할 사람들이 피곤을 핑계 삼아 늦장을 부리고 있는 점은 선장의 입장을 가진 나로서는 백 보를 양보해도 과히 마음에 들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러니 속생각으론 오늘 오후에 퇴선 훈련을 야무지게 해서 이들의 이런 마음의 해이해짐을 단속해야겠다는 어쩌면 나의 심술 끼도 약간은 섞인 과업을 떠올려 본다.
새벽 항해당직을 끝낸 후 브리지에서 직접 TBM 미팅 장으로 내려온 일항사도 해이해진 선원들의 분위기를 같이 보게 되어 민망해졌는지 조용하지만 분주한 움직임으로 사람들을 은밀하게 불러 모으는 눈치이다.
잠시 후 올 사람은 모두 참석했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에 쓰인 정말로 피곤해 보이는 그림자를 보며 오늘은 결코 퇴선 훈련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TBM 미팅에 들어갔다.
사실 출항 24시간 안에 실시해야 하는 안전 비상 훈련 중에 퇴선 훈련은 꼭 들어있는 의무사항이긴 하지만, 하루를 미뤄주기로 마음을 바꾸기로 한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한번 살펴본 선장의 마음으로 내린 결론이다.
*주 1 도등 : 통항이 불편한 수도(水道)나 좁은 만(灣)의 입구 등에 안전한 항로를 알려주기 위하여 항로의 연장선상의 육지에 설치하는 2기 이상의 다른 탑 위에 설치된 높이가 다른 등화를 1조로 하여, 협수로 상의 안전항로를 표시하는 항로표지를 말하며, 등광을 발하지 않는 것을 도표(Leading Mark)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