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잡아 기지로 돌아가려는 어선을 만나고.
날씨가 너무 화창하여 구름 한 점 없이 밝고 맑으니 바다 표면 역시 우리 배의 갑판보다도 더 매끈하니 펼쳐지고 있다.
갑판에 페인트를 칠하려든 오늘의 일과가 이미 바다 위에다 모두 끝내준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서니, 바다 위의 모습들을 그대로 그림 위에 옮겨 담아 주어 매끈하니 보존시켜 줄 방법은 없을까? 엉뚱한 상상 속에 빠져들게 하는 멋진 날씨의 아침이었다.
파도가 없으니 해수가 배 위로 올라올 일이 없어 페인트 칠을 하는 데야 최고의 날씨이지만, 그 대신 바람도 없고 땡볕 마저 무자비하게 내려 쪼이는 한낮이 되면서는 무더위로 인해 일하는 사람들은 무척 힘들은 날씨이기도 하다.
모두들 차광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얼굴을 큰 수건으로 가리어 햇볕을 차단한 후, 칠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배는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조용히 달리고 있다.
에어컨디셔너의 작동으로 시원한 브리지 내에서 앞쪽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저 멀리 수평선에서 가물거리던 작은 점이 배가 되어 나타난다.
쌍안경으로 살펴보니 어선인 듯싶은데 작은 작업선 같은 배도 한 척 거느리고 있다.
예전에는 바다 위에서 이렇게 어로 작업을 하던가 하여간 상선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배들을 만나도 그냥 반가운 마음으로 무얼 하는가? 살피기도 하며 어쨌거나 바다에서 생활하는 동료의식 비슷한 정겨운 마음으로 지나치는 습관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요새는 내 배를 제외하고 물 위에 떠있는 상태로 만나게 되는 모든 상대방들은 혹시 우리를 해칠 수 있는 해적선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부터 챙겨서 조심부터하며 살피게 되는 떨떠름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각박해진 해상의 현실이 짜증스럽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해적 들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적개심이 괜스레 나의 마음을 악하게 만들어 놓는 것 같고, 그 점이 또한 우리들 선원들을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곳은 아직까지 해적의 출현이 보고되지 않은 해역이니 괜찮을 것으로 믿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번 혼이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버릇이 몸에 밴 상태이다.
그 배의 점으로 보이든 모습을 처음 발견, 확인하기 위해 쌍안경을 들 때의 첫 생각은 혹시 해적선은 아닐까 하는 살핌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냥 이 부근 해역 사람들의 어선이라는 확신으로 돌아서면서도, 멀리 지나치어 우리와는 상관없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브리지를 내려왔다.
오후가 되었다. 내일 아침이 되어야 적도를 통과할 수 있는 거리를 둔 남반구의 태평양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지만 기상조건을 생각할 때 오늘 중 적도제를 지내기로 마음을 먹고 오후 4시로 준비시켰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올라간 브리지에서 앞쪽을 살피니 선수 방향에 우리 배를 가로지르려는 모습으로 나타난 배가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 보여 유심히 살피게 하며, 우리의 적도제 행사를 진행하는데, 용왕님께 절한다고 엎드린 우리 선원들의 절이 마치 그 배를 향해 경배하는 모습같이 되어버렸다.
계속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주시하다가 아무래도 우리 선수를 좀 틀어주는 것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의 침로를 오른쪽으로 돌려주며 지나치며 자세히 살피니, 움직이지 않고 드리프팅을 하고 있는 배다.
한 개의 FORE MAST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MAST는 모두 KING-POST 구조의 마스트를 가진 화물선 형태의 배였지만 아무래도 어선-운반선-같은 느낌이 든다.
선체 옆구리에 3 FMK4라는 파나마 소속 CALL SIGN을 크게 적어 놓고 있다. 선명은 너무 작은 글씨로써 있어서 읽어보기가 힘드니 그 점이 혹시 해적들에게 탈취라도 당한 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구지 못하게 만든다.
안 그래도 말레이시아/태국 근해에서 한국인 사관들이 미얀마 보통 선원들과 혼승하던 팜유(야자유)를 싣고 인도로 가던 3,000톤 급의 배가 소식이 끊겼다는 회사 신문의 소식을 보고 있던 중이기에 혹시 저 배가 그렇게 탈취된 그런 배는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폈지만 그 외는 별다른 특징이 없다.
선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이 무슨 수리 작업이라도 하고 있어 그런가 하는 짐작을 갖게도 하지만 우선은 안전하게 빗겨 지나치는 데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가깝게 지나치게 되었다.
갑자기 VHF 전화에서,
-한국 배 맞습니까?
하는 우리말이 흘러나온다.
당직사관이 응답을 하고 나가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 확인하고 보니 바로 그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던 배가 통화를 청해온 것이었다.
동원수산 소속 선박으로 내일 오전 파푸아 뉴기니아에 입항하는데 그 입항 시간을 맞추려고 드리프팅하고 있던 중이었다며 반가운 인사를 청한다.
해상에서 어선을 만나 통화를 하게 되면 그 통화 내용이 상선 선원들과 할 때와는 어딘가 다른 점을 느끼게 한다.
원양 어선의 선원으로 해상에서 몇 날 며칠이고 어로 작업을 하며 지내다가 반가운 우리말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타인을 만났다는 일 자체부터가 즐거운 듯한 어조로, 우선 고국 소식부터 묻는 것이다.
상선원들 간의 통화는 우선 아는 사람부터 찾아 보고, 혹시 타회사 선박과의 통화라면 상대 회사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사항을 묻는 경우를 갖기도 하지만, 어선 선원들과 통화하면 그들은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 전해 달라고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인사로 그런 말을 걸어 주기라도 한다면, 두말없이 그리 해달라고 허락할 태세로 통화를 하는 것이다.
하나 그런 부탁을 받는다 해서 우리들 역시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들도 국내에 들어가면 집에 가야 할 시간에 쫓기기에 남을 배려하며 챙겨 줄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좋은 고기로 만선하시고, 안전항해하세요.
어느새 지나치어 멀어져 가면서, 우리가 보낸 앞부분의 인사말은 상선원들 간에는 없는 인사이다.
그들의 안전항해하라는 인사를 되돌려 받으며 통화를 끝낼 때쯤에는, 의아한 선박으로 조심하던 의심도 사라져 버린, 만나면 반갑기만 한 예전의 전통적인 해상에서의 <봉 보이지!> 분위기로 되돌아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