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이긴 하지만
달무리가 뚜렷이 진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뿌옇게 찌푸리고 있는 옅은 구름이랄까 하여간 반투명하게 흐려있는 하늘에서 상현달이 내려다보고 있는 포항항에 어젯밤 23시 40분에 도착하여 투묘하였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어이 자네들도 고생 많이 했네.
투묘 명령을 받은 선수쪽에서 들려오는 ‘촤르르’ 쏟아져 내리는 닻줄의 풀려 나가는 굉음을 인지하며, 모두들 항해를 무사히 마감하는 안착의 기쁨을 서로 주고받느라고 브리지 안이 잠깐 어수선했다.
이때 미드 나이트(00시-04시)의 당직자인 중국인 교포선원 P군이 23시 45분에 정확히 당직 교대를 해주려고 브리지에 올라왔다.
-시간을 정확히도 잘 맞춰 올라왔군!
지금껏 조타 명령을 받으며 타를 잡아 입항 당직을 수행하고 있던 K 씨가 말을 걸어준다.
교대시간 15분 전 상태를 지켜 올라온 P군에게 잘한다는 칭찬의 소리로 들을만한 편안한 말이다.
-아, 그렇게 맞게 올라와야지요.
듣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올라온 것이 아주 잘한 일이 아니냐는 약간은 제자랑 하는 뜻으로도 들을 수 있는 음색으로 P군이 이야기를 받아 준다. 그런데 칭찬의 뜻으로 해 준 말이 아닌듯 갑자기,
-너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가 있어?
힐난하는 K 씨의 억양이 튀어나와, 대답을 하던 P군이나 옆에서 듣고 있던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입항 S/by 중이면 이어지는 정박당직체제로 바뀌기에 미리 올라와서 조타 일을 조금씩 교대해 주었으면 바랐던, 자신의 기대를 여지없이 저버리고 교대자에게 유리한 항해당직 체제로 응대해오는 상대방에 대한 괘씸함이 그대로 폭발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설사 P가 올라와서 타를 교대해 주려고 했어도 막았을 터였다. 입항 작업중에 존재하는 위험한 고비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선임의 조타수가 일하는 게 안심할 수 있는 선장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훡슬! 지금 앵카 체인 상태가 어떻습니까?
대신 그렇게 자신의 입장만으로 불쑥 화를 내버린 조타수 K 씨 발언으로 인해 민망해져 버린 브리지 내의 분위기에서 얼른 벗어나도록 지금 한창 선수에서 잘 처리해주고 있는 앵카 체인(닻줄)에 대한 보고를 빨리 하라고 필요 이상의 독촉을 트란시버로 일항사에게 보내었다.
K 씨는 이번에 나와 함께 연가로 하선하게 될 입장의 베테랑 조타수로서, 지금껏 별 트러블 없이 잘 지내고 있던 동료 중국 선원과의 관계를 배를 떠나면서 구태여 나쁘게 하고 갈 것은 무엇이람? 하는 마음이 드는 행동을 하였으니 좀은 섭섭한 마음을 들게 만든 것이다.
무사히 항해를 마치는 좋은 일에 왜 언성들을 높이고 그러느냐? 고 더 이상 언쟁을 계속 못하게 막아서며,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서니, K 씨는 슬그머니 브리지 밖으로 나가 애꿎은 담배를 피워 무는 모양이다. 나도 따라 나갔다.
-왜 조용한 분위기에다 파문을 일으키는 행동을 해요? 지금 일은 윗사람으로서 K 씨가 조금 잘못한 거예요.
될수록 온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보태주었으나,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여겼던 기대가 어그러진 상황에 야속하고 당황한 모습이다.
-중국 교포들의 언어가 우리 듣기에는 좀 과격하고 반말 같고 하여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걸 감안해야지, 그렇게 툭살을 주며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 않소?라는 이야기를 보태 주었다.
-좀 더 일찍 올라 와 교대했어야 하는데, 그만 늦게 올라와 죄송합니다.
말 만으로라도, 이런 식의 P군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K 씨였기에, 15 분전에 올라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투로 받은 말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중국교포 선원에 대한 얕잡아 보는 심정도 들어있고, 평소 그들의 말투나 행동이 자신의 맘에 안 들었던 점도 좀 있었을터, 그런 것이 모두 합쳐지니 이 배를 떠나기 전에 군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그런 행동이 돌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중국 교포들은 평소 쓰는 한국어에서 우리가 듣기에는 좀 뻣뻣한 말대꾸 같은 응대와 우리들 귀를 거스르는 억양도 제법 있어 처음 들을 때는 상대를 오해할 소지도 많다.
벌써 백 년 가까이 떨어져 있던 지리적 정치적 단절로 인해 언어문화의 변환이 불러온 영향일 터이지만, 선원들이 그런 걸 하나하나 이해하여 대하기는 좀 부족한 점을 갖고 있어서 생겨난 트러블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의 입장에서는 이제 2 년째 본선에서의 승선 연장 근무를 시작하여 5개월쯤 지난 P군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마음을 어지럽게 해주는 것은 결코 사려 깊은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되므로 무조건 K 씨의 잘못이라고 나무람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K 씨를 몰아세운 데는 평소 그가 술을 좀 마시는 습관이 있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적이 있었음도 작용했으리라. 게다가 항해당직으로 친다면 P군이 당직 시작 15분 전까지 브리지에 등장한 일은 옳은 일이지, 틀린 일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해양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승선 생활 4 년 동안에, 처음 배운 생소한 생활규칙 중 15 분 전! 과 5 분전! 이란 게 있었다.
어떤 집합이나 모임이 있을 때 그 사항을 미리 알려주는 전령사가 호루라기를 불고 나서,
-조별과 집합 15 분전!
하면 대부분 모일 준비를 하고 모일 장소로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기합이 바짝 들었던 일학년 시절에는 이미 지정된 자리에 모여 있을 정도였다.
-조별과 집합 5 분 전! 하면
<5 분 전 상태>라고 이름하여 이미 그 장소에 나가서 집합한 상태로 대기해야 하는 것으로 배우며 생활했다.(조별과란 아침 기상과 함께 체조를 실시하는 과업)
그것이 선박 근무에서도 그대로 이어지어 한밤중 당직 교대 자를 깨우는 것도 당직 시작 15 분 전에 실시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내가 그들의 언쟁에 끼어들어 일방적인 판단의 잣대로 한 편만을 그렇게 꾸짖는 형식이 되게 한 것이 너무 편파적 이진 않았을까? 방으로 내려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조상이야 한 핏줄의 한국인이지만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외국적인 한국 배에 승선 근무하며 알게 모르게 받게 되는 그들의 문화적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로 보아준다면, K 씨만을 일방적으로 나무람한 것이 너무 잘못하는 게 아니라고 우겨볼 수도 있겠다.
더하여 우리 사회가 탈북민이나 중국 교포를 대하는 태도에서 차별성을 두고 조금은 삐딱하니 무시해보는 풍조가 싫은 내 개인적인 감정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라고 덧붙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