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바닥에 눕히면 잠이 들 수 있는 재주
날씨도 춥고 선수에는 파도의 끄트머리가 휘날리어 밖에서의 운동을 포기하고 실내 자전거 타기로 운동을 바꾸려고 2층의 자전거실로 내려갔다.
05150. 자전거 페달을 밟은 다이얼의 레코드를 보여주고 있는 숫자이다.
나도 그런 식의 비슷한 숫자들로 남겨지게 해놓고 운동 실을 떠나고 하는 가락이 있는데, 누군가 나와 경쟁이라도 하려는지, 레코드 다이얼에 그 숫자를 가지런히 05150으로 만들어 놓고 떠난 것이다.
오늘은 갑판 위로 안 나가고 실내에서만 운동을 할 예정이니 평소의 350보다는 많은 양을 하리라 작정하고 페달을 밟아 돌리기 시작했다.
50분쯤 돌렸을 때 05550 이란 숫자가 나타났다. 그 숫자도 보기에 좋고 또 운동량도 400을 한 셈이니 되었으니 일어나 나오려다가 기왕이면 5를 더해서 05555로 만들 자하는 욕심이 생겨 잠깐 더 밟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운동실을 나왔다.
원래 이 방은 개인 방이었는데 승조원의 수가 줄어들면서 빈방이 된 것을 개인이 쓰지 않고, 공동 운동 실로 만들어 쓰고 있기에 침대와 매트리스는 아직 그대로 있다. 마침 그 침대 위에 두 개의 PLUS(+) SCREW DRIVER가 얌전히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이 방에 용무가 있어 왔다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냥 놓고 잊어버리고 나간 모양이다.
기름에 찌들고 낡아진 모양새로 봐서는 그런 물건을 제일 많이 다루는 기관 부원이 사용한 물건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아차! 그 녀석이 놓고 간 것이 틀림없구나!>하는 짚혀지는 한 사람이 있다.
어제저녁 식사 때 1등 기관사의 식사 교대를 해줘야 하는 3등 기관사가 식사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온 배를 찾아 나선 일이 있었다.
그때 기관장이 자전거 운동 실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던 3 기사를 보았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가니 사람은 보이지 않아 다른 곳을 찾아 나섰었는데 아마 그때 그곳에서 눈을 부치고 있다가 떠날 때 놓고 나간 물건이 틀림없어 보인다.
녀석은 심성도 곱고 맡은 바 일도 참 잘 하여 상사에게도 고임을 받는 천상 박용 체질(舶用體質)을 가진 젊은이라는 평판을 동료들한테서 받고 있는 친군데, 쪽잠을 자는데도 일가견이 있어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곳이 어디이건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눈만 감으면 그대로 자투리 잠을 잘 수 있는 그런 용한 잠충이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
잠을 자야 한다고 느끼면 얼마 안 있어 당직교대를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라도 눈을 부치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꼭 찾아 나서게 하는 재주(?)를 가진 녀석.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밉다며 구박도 줄 수 없는 묘한 매력도 가지고 있으니 그것도 복 받은 재주의 하나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 그에게 지난 항차 진짜로 큰 고민이 닥쳤었는데 그로 인해 넋이 빠진 듯한 모습을 이따금 보이곤 해서 우리 모두를 걱정스레 만들기도 했었다.
지난 항차,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정인(情人)의 변심으로 인해 그 잘자던 잠도 설치며 불면의 나날에 몸부림치며 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연가 때만 되면 며칠씩 그 여자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며 그녀의 어머니로부터는 사위에 준 하는 대접까지 받으며 지냈던 아름다운 날들도 있었단다.
무엇 때문인지 여자가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하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으니 전화도 걸지 말라는 말을 항해 중에 걸었던 비싼 인공위성 전화 통화 중에 전해 듣고는 그야말로 낙심천만 잠 못 이루고 고민을 하여 며칠 새 훌쩍 하니 얼굴이 수척해졌던 것이다.
당시 가족 동승으로 같이 승선 중이던 아내를 포함한 선내의 모든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런 얌통머리 없는 X은 차라리 지금 그만두게 된 것이 훨씬 잘된 일이야!라고 위로한답시고 이야기를 걸면, 세상만사 보이는 것이 없고 모든 게귀찮기만 하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어 한 동안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조심스레 주시하는 요주의 상황이기도 했었다.
이제 다시 연가가 찾아와 하선하게 된 요즈음, 그녀의 생각이 계절병처럼 슬그머니 도졌는지 저 혼자 한숨지으며 우울해하는 모습을 이따금 보이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일기사의 저녁 식사를 교대해주러 기관실로 내려오지 않은 그가 은근히 걱정이 되어, 온 배 안을 찾아 휘젓고 다녔는데 정작 그는 일기사 방에서 자고 있었단다.
식사교대를 하려면 자신에게 알려 주겠지 하는 마음에서인지 저녁 과업 때까지 하던 일들을 마무리 지을 때, 손에 들고 있던 공구 마저 손에 든 채 머리를 눕혔다가, 누군가 깨우는 것 같은 때 일어나서 교대하러 간 게 아니라 다시 일기사의 방으로 옮겨가 소파에 누워 버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옮겨갈 때 공구를 챙겨가지 않고 그대로 가버려, 이 아침 내가 운동을 하며 발견하게 된 것이리라.
어쨌든 자리를 옮겨 다시 잠에 빠졌던 걸 보면 그녀와의 아팠던 이별의 인연도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볼 시간이 된 것도 같지만, 그래도 연가로 내린다는 시점을 맞이하고 보니 다시 옛날 그녀와의 애틋한 해후들이 아픔이 되어 살아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1975 년생이니 아직은 여자를 몇 번 더 사귀어 보며 실패와 성공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맛보는 사랑의 시련이 좀 더 있어도 되는 나이이다.
그러니 이제 그녀는 잊고 새로운 네 앞에 진짜 필요한 여자로 나타날 사람을 찾는데 힘을 쏟으며 개척하여라. 하는 말로 그를 다독여 주며 충고를 해주지만 아직도 우울한 모습을 한 번씩 보이니 역시 첫사랑의 흔적은 그렇게 큰 모양이다.
자신의 집에 뻐젓하게 드나들며 부모님의 묵시적인 허락도 받던 남녀의 관계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던져 버려도 몇 년 만 지나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는 걸까?
과감하게 그런 행동을 하는 그녀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그 속내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 것이 현세대의 젊은이들의 사랑이라면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라고 느끼는 내 정조(情調)가 고루한 걸까?
언제이던가? 배를 방선하여 하루를 묵은 후 다음날 식사를 위해 방문 밖을 나서던 그녀를 어찌 그곳을 지나치다가 흘깃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느낌이 사실 어땠는지 정확 치는 않지만, 헌신짝 차 버리듯 가볍게 남자를 팽개친 나쁜(?) 여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려는 지금의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못생기고 심술궂은 별 볼품없는 여자로 느꼈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싶은 심정이 든다.
나의 애정관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향락적이며 이기심의 극치라고 여겨지는 그녀의 태도 같은 이성관을 만에 하나, 우리 아이들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참 난감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