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육상의 소식에 굶주려 있는 해상생활.
ARPA RADAR 화면에 우리 배와 서로 마주 보며 지나가는 것으로 기점(基點)되는 배가 나타났다. VHF 전화로 불러내어 서로 좌현대 좌현으로 비껴가자고 약속을 한 후 계속 육안으로 확인하려고 살폈으나, 찾을 수가 없더니 2 마일 정도로 가까워져서야, 뿌옇게 흐려 있어 평소보다 많이 다가와 있는 수평선 위로 겨우 확인이 된다.
안개만도 아닌 것이, 비와 안개가 뒤섞여 추적추적 적시며 시정(視程)도 아주 짧아지게 만들고 있는 그런 날씨이다.
겨우 육안으로 그림자 같이 확인되는 그 배의 색깔 이건만 아무래도 우리 배와 같은 오렌지색인 것 같아서 다시 불러 확인하니 우리 회사의 자회사인 POS의 NEW EMERALD호란다. 그리고 당직을 서고 있는 사람은 필리핀인 1 항사였다.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내고 올라온 그 배 선장이 나와 통화하고 싶다고 해서 나간다. 인천을 출항하여 호주 GLADSTON에 석탄을 실으려 간다며 양하지는 남미의 칠레란다.
그 배 선장이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이 이야기하는데, 그저 내 이름만 듣고 회사의 연수 교육 때 만났던 정도의 안면인 것으로 느껴진다.
17 명의 필리핀 선원들 속에 선, 기장과 1 기사 세 명만이 한국인으로 타고 있다며 처음에는 어려운 점도 많았으나 이제는 그 속에서 정도 들고 하여 그런대로 생활할 만하다며 10 개월만에 들어간 인천에서 내부감사받고 수리 좀 하고 그냥 출항하였단다.
선원 송출 선이나 다름없는, 아니 그대로 송출선원과 같은 바쁨으로 모처럼의 국내항 기항이었지만 가족들과 만남이 미진하여 서운한 감이 많았던 모양이다.
더불어 격변기 다운, 회사 임직원 인사에서 OO 지점장이 그만둔 것을 보고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자회사의 상무이사로 자리바꿈 했다는 소식도 전해 준다. 명색은 승진으로 보이나 내용면으로는 별 실권도 없는 시한부 임원의 자리로 바뀐 것이다.
또 15 년 이상 근속한 선 기장들 중 10여 명이 8 개월 분의 급여를 더 보탠 퇴직금을 받고 그만두게 되었다는 뉴스를 전해 듣는 순간 속이 뜨끔한다.
나도 근속 15년이 이미 넘은 입장의 선장이란 점이 부각되며 이제는 나도 그렇게 완전히 밀리고 쫓기는 구닥다리의 부류에 편입되는가? 싶은 섭섭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혹시 회사가 나 보고도 나가고 싶으면 떠나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별로 즐겁지 않은 연상(聯想)이 들어서니 더 이상 통화하고픈 마음도 사라져 적당한 인사말을 찾아 안전항해를 기원해주며 전화를 끊었다.
오늘의 우리 해운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쯤에 해당하는 위치로 존재하는 것일까? 새삼스레 나를 돌아보면서, 선원으로서 흘려보낸 한평생을 아름답게 피고 지고 해보려는 어떤 꽃의 일생과 비교해 본다.
백일을 붉게 피고 진다는 백일홍 꽃으로 친다면, 과연 며칠째 붉게 피어 있는 지점쯤에 나는 서 있는 셈일까? 헤아려 보는 마음따라 웬일인가?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아 든다.
제 스스로의 셈도 다 채우고 아름다운 낙화의 미도 살릴 수 있도록, 더 이상의 강풍은 불지 않는 그런 환경으로 주어질 수는 없는 걸까?
남아 있는 기간 별다른 걱정 없이 내 길을 가다가 떳떳이 정년을 채우고 물러서는데 아무런 문제없기를 바라는 마음 되어, 유난스레 초롱초롱한 별빛에 어울리며 어느새 찾아온 초저녁 어둠에 파묻혀가고 있는 브리지를 떠나 방으로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