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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선의 출현

묘박지에 선착을 위한 보고 경쟁

by 전희태
B1(8932)1.jpg 그래드스톤 부두에 접안하여 작업을 기다리고 있던 때의 모습.


오늘은 유난히도 마음 바쁘고, 힘들었던 하루로 기억되기에 충분한 날이었다.

배는 다행히 자신이 낼 수 있는 속력을 최대치로 내주었고, 그에 따라 그래드스톤에 접근할 때 마음 놓고 직접 VHF 전화로 보고한 도선구 도착 시간은 1045시었다.


며칠 전부터 알려졌던 우리 배와의 도착 경쟁 선인 P-CHALLENGER 호의 소식을 그 시점까지 들을 수 없어 궁금한 심정도 들었지만, 별다른 기미를 느끼지 못해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래드스톤 항만 관리소에 ETA를 보고하는 말을 들었음직한 시간을 두고 그 배도 11시 30분에 도착한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그 보고를 듣는 순간, 아무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을 가지면서 그대로 항진을 하는데, 항만 당국에서도 두 배의 경쟁을 눈치채었는지 각각 부르더니 똑 같이 코스와 스피드를 물어 온다.


본선은 176도 코스에 12.4노트로 보고를 했는데, 피-찰렌져호는 156도에 14.5노트라고 보고한다. 코스로 봐서는 본선보다 바깥쪽에서 좀 더 쇼트커트을 하며 안으로 붙이려고 서두르는 낌새를 보이는 코스와 속력이다.


속력을 통보하는 말투가 아주 당당한 어조 같아 우리에게 은근히 폼을 재보는 게 아닐까? 비약되는 생각까지 가지게 한다.


도착지 접근 10 마일 정도 되는 부근에서 결국 우리 배가 뒤질지도 모르겠다는 우려의 기분을 느낄 즈음, 마침 연속으로 나오든 출항선 두 척이 있어서 입항하고 있던 우리 두 배 모두와 우현 대 우현으로 항과 하자는 요청이 있어 우리는 나란히 일자로 서서 들어가야 할 입장이 되었다.


거기에다 이미 항계 내로 들어서게 되었으니, 출입항선의 의무인 급할 때 언제라도 기관 사용이 가능한 기동 속력을 준비하게 되었고, 피 찰렌저호도 우리 배를 추월하려는 의지에 앞서, 우리와 같이 입항선의 의무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속력을 줄이는 과정에서 우리 배가 앞 서있던 정황은 그대로 계속되어 항진하여, 입항 후 투묘하겠다고 점찍고 있던 항계 내 원하던 자리를 찾아가 투묘 시도를 하였다.


이제 우리보다 3 마일 정도 뒤에 떨어져 자신이 예정한 투묘지로 향하던 그 배가 마침 우리 배가 <렛고 앵카!> 발령을 하고도 아직 닻이 내려가지 못해 우물거리고 있던 사이에 항만 당국에 투묘했다는 보고를 먼저 한다.


이미 항계 내에는 본선이 먼저 들어선 상태였으므로, 선착선이란 의미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당연히 앞장선 위치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음을 새삼스레 급하게 만들어 준다.


투묘가 안 되고 있는 사연에 답답한 마음으로 선수부를 향해 다그친다.

-일항사! 왜, 앵카가 안 내려가고 있는가? 뭐 하는 거야?

-브레이크 밴드를 모두 풀어 줬는데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어디 고착이 된 모양입니다.

대답을 들어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우선 좌현 묘로 바꿔서 빨리 투하하고, 우현 묘는 그 후에 손을 보도록 하자.

선수루의 당직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잠시 후 좌현 묘가 준비되었음을 보고 한다. 당장 투하하라는 명령과 함께 촤르르~ 닻줄이 풀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GLADSTONE PORT CONTROL, THIS IS DAEWOOSPIRIT CALLING OVER,

-DAEWOO SPIRIT, THIS IS GLADSTONE PORTCONTROL, GO ON PLESE!

그들이 응답을 한 후 투묘 보고를 한다.

-D/S DROPPED ANCHOR AT 1100(ELEVEN HUNDRED) HOURS, MY ANCHOR POSITION IS 3 POINT 5 MILES OFF, BEARING 210 DEGREE FROM SEABUOY OVER."


알았다는 대답을 해주고 나서 잠시 후, 항만관제소는 OO찰렌저호를 부르더니 항계 내로 진입한 시간을 묻는다.

피-찰렌져가 1018 시라는 시간으로 대답한다. 듣고 있던 우리 배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대답이다.


그들이 우리 배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뜻을 내포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선착선의 이점-먼저 입항하여 작업할 수 있는 점-이 크더라도, 실제 항계 내의 도착은 우리 배가 조금이라도 앞서 있었는데, 그런 식의 보고를 하는 그 배의 뻔한 심뽀가 괘씸하다.


이런 우리 두 배의 입항 시 움직임을 항만 레이더를 통해 직접 보고 있었을 포트 컨트롤 당국의 판단을 믿기로 하고 그 배의 괘씸함을 중간에 나서서 따지지는 않기로 작정했음은 그 배 역시 한국인이 선주이며 한국 선원들이 타고 있는 배이기 때문이었다.


도착 전문을 넣으려고 만들어 놓은 전문에, 항계 도착 시간을 해도 위에 기재된 위치에 적혀있는 시간으로 재확인하여 1040시를 써넣은 후 투묘 시간을 1100시로 알려주며 N/R TENDER를 하는 전보를 넣었다.


아직도 뻥튀기 보고를 한 경쟁선이 한국인이 타고 있는 배라는 점과, 그들의 행동에 대한 불쾌감에 브리지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든 내 앞에 반가운 전문을 들고 당직사관이 나타났다.


-YOUR VESSEL CONSIDERED TO HAVE ARRIVED AHEAD OF POS CHALLENGER, NOR(주*1) ACCEPTED 1100, 20. INDICATION PILOT BOARDS 2145/22 BERTHING STARBOARD SIDE, ETD 1000/23 REGARDS -


우리 배가 도착 경쟁에서 이겨 먼저 들어왔다는 항만 당국의 판정에 이어 선적 준비 작업을 본선이 통보해 준도착 시간(투묘 시간)으로 인증하며 도선사의 승선 시간과 접안은 우현 쪽으로 한다는 예정과 출항 예정 시간까지 확인받은 것이다.


전문을 들여다보는 순간, 신경을 곤두세웠던 긴장이 풀리며, 승리한 성취감을 만끽한다. 또한 그들의 허위보고 시점에 나서서 항의하는 식으로 떠들지 않고 넘긴 일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를 새삼 짚어본다.


그래 봐야 외국에서 한국인끼리 벌린 집안싸움으로 보였을 터이니..... 말이다.


주*1 NOR : Notice of Readiness,

선박이 목적항에 도착하면서 화물의 선적이나 양하 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화주에게 통보해 주는 것으로, 이것을 응락해 준 시간이 모든 지체나 조출의 계산 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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