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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 채우기

선체 갑판 둘레를 운동장 트랙 삼아서 돌아준다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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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의 가장자리 핸드레일 안쪽으로 걷다 보면 여러 가지의 구조물이 발길에 채이기도 한다. 특히 새벽녘의 어둠 속에서 걸을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운동을 계속하다 보면 어디쯤 가면 어떤 장애물이 있다는 점을 경험으로 꿰뚫어 볼 수 있었다.


11,288 아침 된장국 120//점심 빈대떡 4장 86// 저녁 소꼬리 곰탕, 비스킷, 요크르트 130


맨 앞의 숫자가 아침 운동을 끝낸 후의 만보기 창에 새겨진 새벽부터 걸었던 걸음의 숫자이고 나머지는 오늘 식사의 주메뉴와 각 식사를 끝낸 두 시간 후에 검사한 식후 혈당치 목록이다.

이렇게 아침 운동에서 만보를 넘기느라 열심히 노력하여 혈당치의 숫자를 적정하게 유지하며 채워가는 일은 쉬운듯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본선 크기로 봐서 만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12 바퀴(주*1)의 선내 일주를 해야 하는데, 같은 운동 패턴이 주는 지루한 감과 어서 이뤄내야 한다는 초조감까지 겹쳐지어 몸보다는 마음 쪽이 바빠지는 운동 분위기를 갖게 한다.

항상 그런 분위기로 운동을 하던 중, 바쁜 마음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목표량을 끝까지 채울 수 있게 고안해 가진 내 나름의 독특한 만보채우기 운동방법이 있다.


매번 배를 돌 때마다, 이번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한다는, 마치 화살기도를 봉헌하는 신자 같은 마음으로 배를 돌았던 것이다.

한 바퀴씩 선내 일주를 끝낼 때마다 이번에는 막내를 위해서, 다음은 둘째를, 그다음은 큰 애를 위한다는 식으로 지목한 사람의 건강이나 그들이 원하는 일 모두가 내가 끝까지 잘 돌아주어야만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돌았던 것이다.


이따금 그런 방법이 너무 무속적인 어리석은 마음을 키우는 게 아닐까? 되돌아보게도 했지만, 실제로 내 건강을 지키는 게 우리 가족에게도 큰 힘과 도움이라는 사실 앞에, 가족을 앞 세워 실행한 내 생각이 그른 것이 아니란 결론을 내어 다스리도록 했다.


아이들 셋에게 주는 것을 끝내고 아직도 남아 있는 더 돌아야 하는 숫자들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위해 바치는 식으로 간주하면서, 일종의 엄숙한 의식같이 차분한 느낌으로 운동을 치러내도록 했다.


그 순서를 그날 운동을 하러 나가면서 오늘은 나이가 어린애 들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어른 쪽으로 하기로 결정하면, 다음 날은 그 반대로 하는 식으로 한 사람씩 차례대로 배당을 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나한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성실하게 숫자를 채우며 운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꾀를 부려 적당히 넘기고 싶은 마음이 중간에 들 때도 있었지만, 유혹에 져서 그렇게 하면 빠지거나 부실하게 배당해 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며, 공평하게 가족을 대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질 정도이니 매일의 운동 완성은 당연지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위한, 나의 이름을 걸어 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없는 듯해서, 가족 모두에게 두 바퀴씩 기회를 주어 열 바퀴를 채우고 나면, 약간은 모자란 듯싶은 만보 정도밖에 안 되므로, 최종 목표를 초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삼스레 다시 두 바퀴를 열심히 돌아주는 데, 그것을 내 이름으로 하며 도는 것으로 운동의 마무리를 삼곤 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 운동은 모두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고, 조금 더 보태서 이야기해야, 우리 집안을 위해서 하는 셈이다.


운동을 하는 도중에 지루한 마음이 들면, 그만 이 정도 운동하고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수시로 드는 만만치 않은 유혹이 있지만, 가족을 위하여 라는 대전제를 앞세운 가족 사랑과 내 건강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어울려져서, 지쳐 떨어지지 않게 이끌어 주었다.


하루의 첫 과업인 아침 운동으로 선내 일주 목표량을 모두 끝내고, 방금 돌아온 기록을 나의 가족들을 위해 골고루 나눠주었다는 마음 가짐은, 새삼 가족 사랑을 체험시키고, 어느새 원하든 회수인 만보를 넘기는 걸음까지 갖게 하는 즐거움으로 기다려지는 일이 되었다.


승선중 이렇게 잘 다듬어진 몸을 만들어 둔다면, 나중 연가 중에 만나는 친척들로부터 많이 날씬해졌다는 인사의 말도 들을 수 있으니 이 점도 보람과 자긍심을 가지고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주*1 : 배 길이가 287 미터 선폭이 47 미터이니, 장축이 287 미터 단축이 47 미터짜리 타원형의 운동장을 도는 것과 같은셈이다.

쉽게 생각하여 배의 가장자리 쪽으로 걸어 선수와 선미 사이를 한 바퀴를 돌아온다면 최소 574 미터가 된다. 이런 거리의 둘레를 12번 돈다는 뜻은 약 6,888 미터를 걷는다는 뜻이고, 나의 평균 보폭을 65 센티미터로 보면, 만보를 걷는다면 6.5 킬로미터이므로 12 바퀴만 정확히 돌면 만보를 넘어서는 달성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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