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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의 일을 지휘하며

선상 일처리의 책임 범위를 생각해 본다.

by 전희태
CC1(9514)1.jpg 광양항 외항에 투묘 대기중의 모습


어쩌다 보니 몇 개월 째 밀려있던 CROSS DECK의 청락 작업을 오늘에야 겨우 재개시킨다.

이 배로 발령받아 처음 승선하던 때, 첫인상으로 느꼈던 감정과 그때 언뜻 다짐했던,

-내가 타고 있는 동안에 철저히 녹을 떨어내겠다. 고 작정했던 마음을 되돌아본다.


당시 승선 후 처음으로 기항하려 든 항구는 월남의 비나신 항으로 정기검사를 치러내기 위해 입거 하려고 비나신 수리 조선소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배위에 올라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후부 갑판상에는 비나신에 가서 사용할 페인트 등, 창고가 꽉 차서 넣을 수 없게 된 물건들을 실어 놓은 후, 묶어 주는 작업을 하느라고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선체정비를 해야겠다는 내 첫인상과 맞아떨어진 그 당시 배의 스케줄이 선체정비의 마지막 단계인 선체 도장(塗裝) 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배정하여 머나먼 남쪽나라에 새롭게 지어진 드라이독을 향해 떠나려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의 다른 수리들을 대충 끝낸 후 출항할 때 갑판이나 하우스 등 청락 후 도장해야 하는 우리에게 넘겨진 할 일의 양이 적지 않음에 비해 시간이 너무나 촉박한 것에 안달이 나고 있었다.


그렇게 수리선 독을 찾아가고도 더해진 또 몇 항차의 적, 양하지 기항 모두에서 기다림 없이 도착 즉시 접안, 하역작업, 그리고 출항을 반복하는 가운데 정비의 일은 더욱더 밀리고 쌓여 이제는 어느 것부터 먼저 손을 써야 하나를 놓고 한참을 씨름 질 해보는 그런 상황에 까지 와 있다.


다행히도 금 항차 뉴캐슬 출항 후 날씨가 양호해져서 2 번창 앞쪽의 CROSS DECK를 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듯싶어 만사를 제쳐두고 그 일에 매달리도록 주간 갑판부 팀의 일과를 조절토록 했다.


그곳은 만선시 그런 류의 작업을 하기에는 조금만 바람이 앞쪽에서 불어도 파도가 날려 오게 되어 방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쁜 날씨에는 마음 놓고 작업하기가 난처한 곳이다.


게다가 청락 작업은 철판을 두드리는 큰 소리가 만만치 않은 소음이 많은 작업인데, 하우스가 있는 후부 거주구역으로부터 200 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곳이기에 그 소리가 별로 크게 들리지 않아 거주구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작업이다.


주간 작업 팀에게 그렇게 일을 배당해 주었으니 이제는 내 일에 들어설 차례이다. 지난 항차 광양항에서 차후 입항 시 외부 감사를 받기로 합의하고 출항했었기에 그 에 대한 준비도 해야겠고 하여간 바쁜 일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한숨 돌리듯 가만히 둘러본다. 그리고 선원이란 직업이 늘 이렇게 일에 묻혀 지내야 하는 생활로 변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생각해 본다.


그야말로 세기가 바뀌어질 무렵부터 자동화가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지면서 계속 선원들의 척당 정원 배정수도 줄이고 직책도 간소화시키면서 오히려 개인들에게 지워진 일의 범위는 더욱 많아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럴 만큼 선원이란 직업이 바라보이고 누구나 원하는, 경쟁적으로라도 줄을 서서 해보고 싶어 하는 그런 호감이 가는 직업이 된 것일까?


어쩌면 해운이란 업종이 크게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처해있어 선원에게 주어지는 호감보다는 일의 범위도 많고, 위로부터 지시 역시 많은 그런 생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선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든 선장에 대한 여러 가지 권위적인 이야기는 사나이라면 한 번쯤 꿈을 꾸어보는 해볼 만한 일로 남자들의 가슴에 새겨져 왔다. 게다가 이제는 여자들마저 도전해 오고 있는 승선 생활인데 육지에서의 직업 호감도는 어디쯤까지 와 있는 것일까? 알듯 하면서도 모를 일이다.


선박이 세계 어디에 나가 있더라도 즉시 호출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전 지구적인 통신체계 안으로 묶어져 있는 현실에서, 본사의 지시가 즉시 본선에 반영됨은 당연한 일로 되었다.


따라서 선장의 지위는 그의 배가 어디에 있던 현장의 총사령관으로 군림하던 형편에서, 이제는 회사가 위임해주는 범위 내의 일만을 전달, 처리하는 명목상의 현장 지휘관으로 강등된 형편이라 느끼며 근무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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