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 원서 쓰는 것이 마지막 인연일까?
점심 식사 시간이 시작될 무렵 기관장이 서류 한 장을 달랑 들고 내 방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물으며 맞아들이니, 기관부원 중 한 사람이 낸 사직 원서를 내민다.
특별한 폼을 갖추어 쓴 것이 아닌, 그저 일신상 일로 하선하려고 하니 선처 바랍니다. 식의 간단한 글귀로 하선하여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적은 A-4 용지인데 볼펜으로 끄적거리듯 쓴 사직서이다.
지금 당장 항해 중인 배안에서 하선하여 어딜 가겠다는 뜻은 아니고, 그나마 우리나라에 입항하면 내려서 그만두겠으니 후임자를 물색해 놓으라는 일종의 통보서 같은 의미의 사직서이다.
지난번 연가를 마치면서 광양항에 입항하고 있던 본선에 다시 승선하려고 광양지점에 들렸을 때, 먼저 사무실에 와 있었던 기관장을, 나와는 안면이 없는 어떤 젊은 친구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으로 만났었다.
당시 기관장이 우리 배를 타게 된 기관수 이모라고 그 자리에서의 인사를 시켜주었기에 기관장과는 잘 알고 지내던 부하 선원일 거라 속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인물이 어제저녁 사직서를 써 들고 와서 배를 내리게 해달라고 한 것이란다.
사실의 전말을 알아보려고 그를 방으로 불러 정확한 사직의 이유를 물으니, 지난 연가 중에 맞선을 수도 없이 봤는데, 배를 탄다고 하니 그때마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 버리니 장가들기 위해서는 배를 내려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사직 원서를 써 왔다는 것이다.
그럼 아예 그때부터 배에 오지를 말았어야지 언감생심 한 항차 하고 나서 이렇게 내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니냐고 따져본들 이미 마음이 들떠 버린 상대방은 내가 내리고 싶어서 내린다는데.....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현실인 듯 싶어 보인다.
더 이상 감정을 소비하며 언쟁 아닌 언쟁을 유발하기는 싫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픈 이야기는 있다.
맞선 상대자가 배를 탄다고 하면 무조건 결혼 상대자에서 제쳐 버리는, 현세대의 여자들의 결혼관이나 그런 것이 쉽게 용납되는 현 세태의 풍습이 우리들 선원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일수가 없고, 우리의 직업이 이렇게 냉대받는 천덕꾸러기 같은 신세로 전락한 자체가 서운한 것이다.
배를 타고 있는 주위의 동료들을 둘러보면 장가 못 간 노총각들이 부지기수로 보인다. 이들 대부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을 하려고 기회를 만들어 맞선을 볼 때마다, 결과는 거의 모두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지만 결과는 배를 탄다는 점이 거절하는 결격사유의 가장 큰 근본적인 이유란다.
그런데 요사이는 둘러치는 핑계조차 대지를 않고 아예 직설법으로 배를 안 타면 안 됩니까? 하며 배를 타면 결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해대는 여자들마저 많아진 세태가 서럽기조차 한 것이다.
그러니 65년생의 나이로 결혼의 적령기를 이미 한참을 넘긴 상태로서 속마음 타는 거야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자기가 챙겨야 할 것은 다 가지려 하면서, <같은 솥의 밥을 먹는다는 의리의 명색을 가진 사회에서> 양보할 것 한 가지도 안 남겨 주려는 그의 마땅치 않은 욕심 많은 태도가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결혼을 할 생각이 있었으면, 그 순간부터 아예 우리 배에 오지 말았어야지, 회사의 발령이야 있었지만, 그 점에 아무런 이의제기도 없이 제 발로 터벅터벅 찾아와서 근무를 한 점이 나로서는 섭섭한 것이다.
아직 의무 승선 기간이 몇 개월 남아 있건만, 한 항 차 근무하고는 뜬금없이 사직 원서를 들이밀면서 배를 내리겠다고 하는 것은, 잘 생활하고 있는 우리 배의 분위기에다 재를 뿌리는 일이요, 본선의 선내 분위기에 흙탕물을 튕겨주는 행위인 점이다.
아울러 회사에게는 본선이 무슨 문제점이라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조차 보낼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제공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안 그래도 지난 항차 2등 기관사라는 친구가 교대차 배에 왔다가 한 시간도 안 되어 다시 내려간다고 해서 그 뒷수습을 하느라 회사도, 배도, 광양 지점도 출항 전에 어수선하니 시끄러웠던 일이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 이 친구까지 덩달아 속을 뒤 짚고 있으니 괘씸한 마음으로야 무슨 욕을 못하랴마는 -미운 녀석 떡 하나 더 준다고,- 그냥 꾸욱 참고 기관장을 시켜 회사에 전화를 걸어 교대시킬 수 있도록 청하라고 일러둔다.
내가 싫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많은 거야?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그의 뜻이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바람직한 것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우리 배를 헤집는 것 또한 싫은 일이다.
그래도 산뜻한 마침표를 찍고 싶은 마음에서 사직 원서는 좀 더 깨끗이 정성을 들여 써서 제출해야 한다고 돌려주는 심술 한 번으로 끝맺음을 해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