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으로 생각해본다
너무 기쁘고 조심스러워서 그런 것 같지만 이미 한 달이 되어오고 있는 둘째 애의 취직이 정말로 된 것인가 아직도 못 미더워지는 조심스러운 심정인데, 더하여 여태까지 그 애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름 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상태인, 바다로 나가 생활하고 있다는-선원이란- 내 형편이 조금은 미안하게 느껴지는 심정이다.
녀석을 생각하면 내 자식 중 제 혼자 힘과 제 실력을 바탕으로 해서 정식으로 취직, 입사하여 월급을 받아오는 첫 녀석이니 늦기는 좀 했어도 기특한 마음도 가져보는 요즈음이다.
멀리서나마 녀석의 건투를 빌어 주고픈 마음으로 생각하다 보니, 몇 년 전 녀석의 학창 시절에 몇 번 부산에 내려가서, 녀석과 함께 발바닥이 아프게 다리품을 팔아가며 시내 여기저기를 함께 돌아다녔던 일이 떠 오른다.
당시 초량에서 고관 입구까지의 길을 함께 걷게 되었을 때 나는 나대로의 추억에 빠졌었고, 녀석도 제 나름의 부산 생활을 생각하며 걸었던 모양이다. 마침 성 분도 병원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였다. 녀석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아버지, 이 병원이 제가 태어난 병원이 맞지요?
내 생각에 빠져 미처 기억 못 하고 그곳을 지나치고 있었지만 녀석은 자신의 태어남이 이뤄졌던 곳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향-출생지-이 부산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제공하고 있는 그 병원을 모른 척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1971년 10월 중순경. 아내는 둘째를 낳으려고 친정인 부산을 찾았었다. 그때 아내의 친정 식구들은 쌍둥이를 잉태한 것으로 오해할 만큼 제 엄마의 배를 무겁게 부풀려 놓았던 상태에서 4킬로그램이 넘는 우량아로 무사히 태어난 녀석을 기쁘게 받아 주었다.
그런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병원 모습 등을 이미 그때부터 눈으로 보고 알고 있었던듯한 반가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면서 이야기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부산은 6.25 사변 중 1.4 후퇴 이후부터 환도할 때까지 살아야 했던 피난 시절의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 있고 해양대학생활 4년과 선원으로서의 모항으로 자주 기항했던 향수마저 함께하고 있는 곳이다.
피난시절에는 당시 수정동 산복도로 인근인 경남여고 위 운동장 부근의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던 나에게 성분도 병원 주위의 길들은 영주동 산 언덕배기에 있던 큰집 가게를 찾아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중간의 길목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날도 학교가 파하고 난 오후 시간 중에 엄마의 심부름으로 수정동 산꼭대기에 있는 집을 떠나 영주동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초량 입구에 들어서 조금 더 가다 보면, 김상용 안과병원이 저만치 보이는 큰길 옆 보도에 피난민들이 차려놓은 좌판도 제대로 못 되는 돗자리 등으로 펼쳐 놓은 난전판 앞을 지나가야 했다.
마침 한 곳을 지나치다가 만화책들을 멍석 위에 펼쳐놓고 앉은 채, 손님을 기다리는 허술한 노점 좌판에서 평소 보고 싶었던 만화책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도저히 그대로 외면한 채 그곳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멈춰 선 발걸음은 돈 한 푼 없는 주제마저 잊은 채 눈치껏 슬그머니 다가가 쪼그리고 앉은 후, 한 권씩 야금야금 뒤져보다가 어느 틈에 <다음 편에 계속>에 이끌린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게 되었다.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가니 지금 정확한 책의 제목은 잊었지만, 아마도 <XX대장>이나 <XXX의 모험>따위의 이름으로 된 시리즈 만화였던 것 같다. 첫 편의 읽기를 마친 후 그 자리를 떠나기에는 다음 편에 계속이란 이야기의 꿰미에 묶이어 조마조마한 유혹의 뒤적임에 빠져드니, 밝았던 오후가 슬며시 어둠에 파묻혀 드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게 되었다.
돈도 내지 않은 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의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 나를 쫓아 버리거나 뭐라고 꾸짖는 일도 없이, 오히려 쪼그리고 앉아 있는 멍석 귀퉁이 내 쪽으로 카바이드 불까지 켜서 놓아주면서도 무언의 시선마저 빗겨 피해 주던 그 주인장의 행색은 전쟁통의 물자 부족으로 인한 없어 보이는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내가 그 만화책을 끝까지 다 볼 수 있도록 말없는 작은 행동으로 배려해 주었던, 초라한 옷차림의 40대 아저씨와 한 길가의 좌판. 그야말로 전쟁 중이란 극한 상황 속에서도 넉넉한 마음씨를 피어낸, 어쩌면 순정 만화의 한 컷 같은 장면으로 내 머리 속에 인화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한 장면 되어 그 후의 내 인생에서는 잊을 수 없는 인자하고 넉넉한 후광을 지닌 그림자 같이 남아버린 인연이었다.
그렇게 흘러 간 50년대 초반의 바래진 세월의 장면과는 많이 벗어난 현실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여기였구나 싶은 자리에 서니, 전쟁과 피난 중에도 아이들에게 마음을 써줄 수 있었던 여유로움을 간직했던 그 노점상 아저씨의 훈훈했던 정이 못내 그리워졌다. 결코 그 아저씨에 대해 아는 것 하나도 없지만 이제는 그냥 내 마음속 영원히 살아있는 마음씨 후한 아저씨와 좌판이 흐뭇할 뿐이다.
나 혼자 만의 마음속에 갈무리하고 있던 추억의 새삼스러운 곳임을 확인하며, 문득 미래의 어느 날, 둘째 애 역시 이 거리를 같이 걸었던 기억이라도 떠올리게 되는 때가 있다면, 녀석은 자기대로의 어떤 사연들을 덧붙여서 아련한 추억으로 상기하며 행복했던 순간으로 반추할 수 있을는지 궁금해진다.
-얘야! 아빠와 함께 이렇게 부산을 거닐고 있는 지금을 먼 훗날 너는 어떤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겠니?
혼자 속으로 자문해보는 마음만인데도 그냥 콧날이 시큰해진다. 내가 늙어 간다는 증거를 보태기 위해 그런 감정의 편린들이 꿈틀거렸던 모양이다.
부산은 그렇게도 나에게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고향 같은 곳이다. 아니 제2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