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에서 하는 이발
새벽 네 시쯤 되어 이제 광양항의 도선사가 승선할 위치가 약 두 시간 거리로 남아 있는 시점에 갑자기 안개가 짙게 앞을 가리며 나타난다.
시정이 최악의 경우로 더욱 악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도착 약속 시간인 여섯 시에 닿기 위해 레이더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우리 배의 위치를 확인하고, 접근하는 작은 어선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아무래도 무중 속력까지 실행하며 달려야 하니 최종적인 통보로 30분이 늦어진 ETA를 <항무 광양>에 다시 연락해 주었는데, 그래도 도선사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곧추선 신경 속에 힘겨운 항해였지만, 무사히 광양의 도선구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도선 선이 접근하여 도선사를 본선 위로 승선시켜 준다.
도선사의 조선이 시작되면서 거짓말 같이 안개도 슬금슬금 걷어지며 시정을 회복시켜 주니 차근차근 풀어지는 이런 기상의 회복이 새벽 내도록 걱정으로 짓눌리고 있던 마음을 푸근하니 풀어놔 준다.
배도 덩달아 차분하게 조선에 응해주듯 움직여 주니 접안 작업 역시 아무런 지체 없이 무사히 끝내면서 갱웨이 설치도 마쳐주니, 새벽에 도착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미리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던 아내와 다른 선원 가족들도, 지점의 입항수속 근무자와 같이 올라온다.
우리 생활에는 늘 있는 이별과 만남이지만, 그래도 상봉의 기쁨은 언제나 새로운 활력으로 다가오는 일이다.
두 달 가까이 떨어져 있던 이별의 끝을 기쁨으로 만끽하며, 현문을 올라선 아내를 은근 슬쩍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은, 이제 이 정도의 스킨십은 애교로 봐줄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변해진 걸 은근히 즐길 수 있는 기쁨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난 후 방으로 올라와서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이발 가위와 이발기를 꺼내었다. 뒤 따라 방에 들어서는 아내에게 들이밀듯 이발기구를 건네주며 머리를 깎아 달라고 이야기를 한다.
아내는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이발부터 조르느냐고,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행동은 이미 이발시켜 줄 준비를 하면서 가운과 가위를 받아 든다.
잠시 후 시원스레 깎은 머리에 세발까지 마친 후, 발라스트 컨트롤 룸을 향하였다. 우리 배의 하역을 총지휘하는 곳이니 하역의 진행 상황을 귀띔받아두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선장님 머리 언제 깎으셨어요?
하역회사 사람들과 같이 이야기 중이던 일항사가 문을 들어서는 나를 보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밖으로 상륙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언제 머리 깎을 시간이 있었느냐는 뜻도 담고 있는 물음이다.
-전용 이발사가 왔기에 깎은 거지 뭐!
아내가 깎았다는 점을 은근히 내비치며 자랑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는 우리 배 승조원인 조선족 중국 선원과 하역회사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기회에 그들에게 선원의 알뜰하고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엉뚱한 심정도 은근슬쩍 가지고 하는 대답이다.
-한 30년 전속으로 했으니, 정식으로 이발을 배우진 않았어도, 이 정도 솜씨가 되는 모양이야.
자랑 삼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동안 이발비 아낀 것을 따로 모았다면 집 한 채는 샀을걸~.
하는 농담도 곁들였다.
아렇듯 은근한 자랑의 염을 가지게 하는 <아내의 이발해주기 작업>은 오래전 우리나라에 퇴폐 이발업소가 사회적인 지탄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무렵에 그런 곳에 가지 않겠다는 내 생각을 아내에게 알려주며 그 실천 방안으로 앞으로 나의 이발을 맡아서 해달라는 부탁을 자연스럽게 꺼내면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렇게 발단된 아내의 이발 작업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 애들 조발까지 더해진 우리 집안의 작은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나쁜 관습으로 나타나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퇴폐이발소라는 항목에서 우리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월을 살아갈 수 있게 한 점은 아내의 직접 조발이 이루어 낸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을 수 있지만, 더하여 돈을 절약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적은 액수는 아닐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제치고 무엇보다도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우리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머리 깎기가 끝나는 즉시 쉽게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샤워도 할 수 있게 미리 윗도리를 모두 벗은 채 조발에 임하면서, 그간의 지나간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며 진행하는 과정은 가족 간에 있을 수 있는 오해의 벽도 허물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서로의 사랑하는 마음을 은연중 주고받으며 확인도 할 수 있는 즐겁고 기다려지는 행사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