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싫다는 어느 항해사
브리지의 컨트롤 패널에 있던 구형의 VHF 전화기가 오래 전부터 사용 불가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얼마 전에 아예 철거해내고, 그 자리를 손전등과 브리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작은 도구들을 넣어두는 공구함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물건들로 채우고도 휑하니 한 귀퉁이가 비어 있는 모습이 을씨년스러워 임시로 두꺼운 골판지로 뚜껑을 해서 덮어가며 사용을 해왔는데, 보는 사람들 모두가 손을 더 봐야겠다는 마음들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 전 <선내 위생 점검> 중에, 원래는 사훈이 담긴 액자였지만 중간에 누군가 그림을 넣어 사용하다가 다시 치워져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이 발견되어, 그 액자에 필요한 문건을 다시 넣어 사용하려고 브리지로 가져가서 3항사에게 게시 서류를 잘 넣은 액자로 새롭게 만들어 두도록 지시하였었다.
액자에 필요한 게시물을 찾아 넣은 후 적당한 장소에 부착시켜서 전 승조원이 그 게시물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보라는 지시로서 나는 그 액자와 관련된 일에서 벗어나기로 한 것이다.
오늘 아침 브리지에 올라가 둘러보던 중 그 임시 공구함 뚜껑이 멋진 사진의 커버로 씌워진 것을 발견했다.
흰 눈을 덮어쓴 가파른 삼각형 모양의 비닐 코팅으로 인쇄된 겨울산의 모습이 바로 어제 3항사에게 맡겼던 액자에 넣어진 채 커버로 둔갑한 것이다.
외국제 달력에서 오려내었음직 한 사진으로 옛날 이발소 벽에나 걸어 두었을 그런 풍경사진 이기는 하지만, 볼품없는 마분지로 가려주기보다는 훨씬 나아 보여 그렇게 만들어 놓은 3항사가 기특해 보일 지경이다.
더운 열대지방을 자주 다녀야 하는 배 안에서, 아주 시원해 보이는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몸에도 두른 모습의 산 사진은 그럴듯하니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거 융프라우 산인 모양이지?
마침 옆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일항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산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일항사가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을 받아준다.
-이 더위에 아주 시원하게 보이는 좋은 그림이잖아?
그래도 내 생각에 동의를 구하는 태도를 더하며 다시 말을 걸었는데,
-아닙니다. 저는 눈이 있는 모습만 봐도 삭막하고 추워서 싫은데요!
시원한 느낌의 눈 경치로 동의를 구하려는 물음에 대한 답으론 어딘가 벗어난 대답이지만, 눈에 관한 화두로는 또 다른 감성이 넘치는 대답에 잠깐 멈칫해졌다.
-왜? 겨울에 눈이 오면 풋풋하고 멋지쟎어?
-저는 눈이라면 진저리가 쳐지는데요.
눈에 진저리 쳐진다는 말이, 그것도 이 더운 날씨에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눈 풍경인데 싶어 의아한 마음으로 되짚어 보려는데,
-눈이라면 무조건 쳐다보기도 싫은 걸요.
여전히 덧붙이는 부정적인 말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래 그곳은 겨울이면 눈이 너무나 많이 오는 곳이지.....
순간적으로 일항사가 설경을 대하는 느낌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눈이란 생활하는데 고통만 주는 현상>으로 각인된 상황임을 깨달아 중얼거리게 된 것이다.
그런 일항사의 고향이 <겨울눈-폭설>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에서도 눈이 제일 많이 오는 곳 중의 한 곳인 울릉도란 것이 떠 올랐던 것이다.
-제가 초등학교 때 학교 가려면 집에서 40분 정도 걸렸어요.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하굣길에 겪는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도 눈만 보면 그저 춥고 삭막하니 느껴질 뿐이랍니다.
대책 없이 달려드는 눈보라에 힘겨워하는 어린 꼬마의 모습이 절로 떠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이 오면 즐거운 느낌으로 대하지만, 눈보라가 휘익 하니 얼굴을 덮어 씌울 때 느껴지는 그 차가운 소름 끼침이란 생각하기도 끔찍한 공포였지요.
에어컨디셔너가 힘겹게 시원함을 유지시켜 주는 브리지 안이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란 것을 모습으로 보여준다.
-학교에 가도 맨 시멘트 바닥으로, 한기가 흘러넘치는 교실 안에다 함부로 퍼부어지는 눈보라를 보게 되면, 다시 집에 갈 생각으로 아득하기만 하였죠.
한 겨울 흰 눈발이 날리는 걸 보는, 보통사람들이야 거의 모두가 눈은 포근한 것이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볼 때도, 그는
-어휴! 저 지겨운 눈은 왜 또 온단 말이야!
하며 찌푸린 마음으로 하늘을 보며 자랐던 것이다.
그의 이런 옛 생각은, 명화 인양 사진 찍혀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는,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알프스의 어느 산 사진을 두고, 이렇게 춥고 떨리는 푸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항사는 후덥지근한 한여름의 날씨 속에 팽개쳐진 브리지 안에서, 에어컨디셔너의 도움보다도 오히려 더 춥게 만들어 주는 서늘함을 그 사진을 통해 이미 전달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진 속의 산 이름을 여기저기 찾아서 나중에 알아내었다. -융프라우-가 아닌 알프스의-마터호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