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에 눈 이야기 하기

눈이 싫다는 어느 항해사

by 전희태
빙설제거작업3.JPG 겨울철 북태평양에서 종종 만나는 선상의 빙설 제거 모습


브리지의 컨트롤 패널에 있던 구형의 VHF 전화기가 오래 전부터 사용 불가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얼마 전에 아예 철거해내고, 그 자리를 손전등과 브리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작은 도구들을 넣어두는 공구함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물건들로 채우고도 휑하니 한 귀퉁이가 비어 있는 모습이 을씨년스러워 임시로 두꺼운 골판지로 뚜껑을 해서 덮어가며 사용을 해왔는데, 보는 사람들 모두가 손을 더 봐야겠다는 마음들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며칠 전 <선내 위생 점검> 중에, 원래는 사훈이 담긴 액자였지만 중간에 누군가 그림을 넣어 사용하다가 다시 치워져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이 발견되어, 그 액자에 필요한 문건을 다시 넣어 사용하려고 브리지로 가져가서 3항사에게 게시 서류를 잘 넣은 액자로 새롭게 만들어 두도록 지시하였었다.


액자에 필요한 게시물을 찾아 넣은 후 적당한 장소에 부착시켜서 전 승조원이 그 게시물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보라는 지시로서 나는 그 액자와 관련된 일에서 벗어나기로 한 것이다.


오늘 아침 브리지에 올라가 둘러보던 중 그 임시 공구함 뚜껑이 멋진 사진의 커버로 씌워진 것을 발견했다.

흰 눈을 덮어쓴 가파른 삼각형 모양의 비닐 코팅으로 인쇄된 겨울산의 모습이 바로 어제 3항사에게 맡겼던 액자에 넣어진 채 커버로 둔갑한 것이다.


외국제 달력에서 오려내었음직 한 사진으로 옛날 이발소 벽에나 걸어 두었을 그런 풍경사진 이기는 하지만, 볼품없는 마분지로 가려주기보다는 훨씬 나아 보여 그렇게 만들어 놓은 3항사가 기특해 보일 지경이다.


더운 열대지방을 자주 다녀야 하는 배 안에서, 아주 시원해 보이는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몸에도 두른 모습의 산 사진은 그럴듯하니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거 융프라우 산인 모양이지?

마침 옆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일항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산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일항사가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을 받아준다.


-이 더위에 아주 시원하게 보이는 좋은 그림이잖아?

그래도 내 생각에 동의를 구하는 태도를 더하며 다시 말을 걸었는데,


-아닙니다. 저는 눈이 있는 모습만 봐도 삭막하고 추워서 싫은데요!

시원한 느낌의 눈 경치로 동의를 구하려는 물음에 대한 답으론 어딘가 벗어난 대답이지만, 눈에 관한 화두로는 또 다른 감성이 넘치는 대답에 잠깐 멈칫해졌다.


-왜? 겨울에 눈이 오면 풋풋하고 멋지쟎어?

-저는 눈이라면 진저리가 쳐지는데요.


눈에 진저리 쳐진다는 말이, 그것도 이 더운 날씨에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눈 풍경인데 싶어 의아한 마음으로 되짚어 보려는데,

-눈이라면 무조건 쳐다보기도 싫은 걸요.

여전히 덧붙이는 부정적인 말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래 그곳은 겨울이면 눈이 너무나 많이 오는 곳이지.....

순간적으로 일항사가 설경을 대하는 느낌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눈이란 생활하는데 고통만 주는 현상>으로 각인된 상황임을 깨달아 중얼거리게 된 것이다.


그런 일항사의 고향이 <겨울눈-폭설>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에서도 눈이 제일 많이 오는 곳 중의 한 곳인 울릉도란 것이 떠 올랐던 것이다.


-제가 초등학교 때 학교 가려면 집에서 40분 정도 걸렸어요.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하굣길에 겪는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도 눈만 보면 그저 춥고 삭막하니 느껴질 뿐이랍니다.


대책 없이 달려드는 눈보라에 힘겨워하는 어린 꼬마의 모습이 절로 떠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이 오면 즐거운 느낌으로 대하지만, 눈보라가 휘익 하니 얼굴을 덮어 씌울 때 느껴지는 그 차가운 소름 끼침이란 생각하기도 끔찍한 공포였지요.


에어컨디셔너가 힘겹게 시원함을 유지시켜 주는 브리지 안이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란 것을 모습으로 보여준다.


-학교에 가도 맨 시멘트 바닥으로, 한기가 흘러넘치는 교실 안에다 함부로 퍼부어지는 눈보라를 보게 되면, 다시 집에 갈 생각으로 아득하기만 하였죠.


한 겨울 흰 눈발이 날리는 걸 보는, 보통사람들이야 거의 모두가 눈은 포근한 것이라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볼 때도, 그는

-어휴! 저 지겨운 눈은 왜 또 온단 말이야!

하며 찌푸린 마음으로 하늘을 보며 자랐던 것이다.


그의 이런 옛 생각은, 명화 인양 사진 찍혀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는,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알프스의 어느 산 사진을 두고, 이렇게 춥고 떨리는 푸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항사는 후덥지근한 한여름의 날씨 속에 팽개쳐진 브리지 안에서, 에어컨디셔너의 도움보다도 오히려 더 춥게 만들어 주는 서늘함을 그 사진을 통해 이미 전달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진 속의 산 이름을 여기저기 찾아서 나중에 알아내었다. -융프라우-가 아닌 알프스의-마터호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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