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엔지니어의 모습
HAY POINT항의 부두는 사실 본선이 선적 작업을 하기에는 좀 짧은 부두를 가지고 있다.
선적을 해주는 로더(Loader)가 움직이는 트레블링 트랙(Travelling Track)의 레일(Rail)의 길이가 본선의 양 끝단 선창인 1번 창과 9번 창 사이의 길이에 조금 못 미치게 설비되어 있는 것이다.
그 부두를 신설할 즈음의 최대 선박을 염두에 두고 만든 부두였겠지만, 그 후 선박의 대형화가 그 부두를 그만큼 작아지게 만든 셈이다.
따라서 선적 로테이션이 1번 창에 어느 정도 짐을 실어준 후, 9번 창에 새로이 실어야 하는 경우에 닿아서면 배를 앞쪽으로 좀 당겨 옮겨준 후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작업 시작 전에 이미 하역회사와 양해하고 있던 라인 쉬프팅의 요청이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옮겨 주어 뒤쪽인 9번 창 선적을 먼저 끝내고 나면, 다시 뒤로 당겨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반쯤 남아 있는 1번 창을 마저 채워주는 예정이 아직 번거롭지만 남아 있다.
어쨌건 본선에 짐을 Full and Down(주*1 만선)으로 가득 싣기 위해서는 1번 창을 레일 끝단 부분보다 20여 미터 정도 앞쪽으로 옮겨 주어야 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조석도 정조 때에 맞추어 물의 흐름이 쉬고 있는 시간에 라인을 옮기고 당기어 작업을 시행하려고 정조 10분 전쯤에 전 선원을 대기시킨다.
조석 차이가 크지 않은 시기라 엔진의 사용 준비 없이도 쉬프팅 작업이 가능하다는 대리점의 조언은 있었지만, 기관장의 배려는 엔진의 준비(Standby Eng.)를 일부러 하였고, 실제 사용까지 하며 1번 창을 로더 움직임의 앞쪽 20미터 정도 위치로 보내며 배를 묶어 주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런 와중에 주기에서 물이 새는 걸 발견했고,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더 큰 사고가 우려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쉬프팅이 끝난 후, 기관 수리 허가를 요청하러 기관장이 찾아왔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너무나 많은 정성을 쏟다 보니 안 해도 될 일을 자청하여, 엔진도 사용할 수 있게 준비시켜 무사한 SHIFTING으로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주더니, 그렇게 선내 일에 최대로 협조해 주는 기관장의 열심에 하늘이 감탄해서 알려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수리 일은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수리를 위해서는 우리 배를 그 시간만큼 꼼짝 못 하는 DEADSHIP(주*2)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곳뿐 만이 아니라 모든 항구가 다 그렇지만, 항만의 법규는 부두에 접안한 채로 기관 수리 작업을 할 경우 안전을 고려하여 그들 항만당국의 정식적인 허가를 받은 후에야 기관수리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두고 있다.
기관의 책임자가 안 하고는 불안해서 안 되겠다는 작업을, 그런 이유 등을 들이대어 실행하기가 힘들다고 반대할 수는 없는 일, 알았다는 말로 대답은 했지만, 어쨌거나 자주 그런 식의 일거리를 벌이기만(?) 하는 기관장이 좀은 야속할 지경이다.
본선에는 임시로 승선한 기관장이지만, 기관실에 내려갔을 때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면 그토록 하지 않을 수가 없어 계속 일을 찾아 파묻히는 성정인데, 그 사실 자체로 이미 엔지니어로서는 더할 수 없는 바람직한 덕목을 갖춘 사람이란 뜻을 내포한 셈이니, 나의 입장으로서는 그럴 수 없이 괜찮은 동료를 만난 것이다. 하나 기관부 소속의 동료나 부하들은 아무래도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일의 과부하가 싫을 수밖에 없으니 입을 삐쭉 이는 형편이란 점도 알고는 있다.
오늘은 밤늦은 시간인 11시경이 되면, 좀 전에 바짝 앞쪽으로 당겨서 끌어줬던 자리에서 다시 원래 대로인 뒤쪽으로 돌려주는 라인 쉬프팅(계류삭옮김)을 예정해 놓고, 그렇게 기관의 점검에 들어갔던 것인데, 결과에 따라서는 수리할 각오를 다지며 시작한 작업이었다.
만약 엔진 개방 후에 그가 우려했던 일이 발생된 상태가 되더라도, 밤샘 작업을 해서 원상복구 수리를 끝내 출항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항해도 안전하도록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밤 11시가 되었다. 예정했던 라인 쉬프팅이 엔진 준비 없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우려를 괜한 걱정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기관실 작업에 동참한 기관부 인원을 뺀 나머지 전 선원이 참여하여 열심히 배의 위치를 원하는 곳에 묶을 수 있도록 라인을 옮기고 당겨주는 일을 윈치와 윈드라스만을 사용하여 무사히 끝내었다. 작업 완료를 확인한 후, 뒤처리하고 해산하도록 지시하며 방으로 왔다.
아직도 기관실에선 수리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 선 안심할만한 상황이란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주*1 Full & Down : Full은 부피로서 가뜩 채우는 것이고, Down은 무게로서 흘수를 다 채워주는 상태, 즉 무게나 부피 두 방향 모두에서 만족할 만큼 채워진 상태를 뜻하는 말. Full의 경우는 무게중심이 Top Heavy 상태 쪽이고 Down 의 경우는 무게중심이 Bottom heavy에 가까울 수 있으므로 각각의 선체 움직임의 특징도 반대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킨 선적 컨디션이 통상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선박의 선적 운항이랄 수 있을 것이다.
주*2 Deadship : 배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관 동력이 모두 차단된 상태를 뜻함. 기상의 악화나 기타 급히 본선이 스스로 움직여야 할 경우 움직일 수 없기에 매우 답답하고 위험한 상태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