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마주 보며 지나치는 배들의 떼를 만나다.
JOMARD ENTRANCE를 한 항차에 왕복 통과하면서, 모두가 환한 밝은 시간일 경우는 좀 귀한 편인데 이번 항차는 내려올 때는 오후 4시경이었고 올라가는 항해에서는 밝은 시간인 아침 8시에 시작되었다.
단지 날씨가 고약하여 연무가 엷게 낀 좋지 않은 시정이라 좀 답답한 마음이 든다.
그렇긴 하지만 요즘은 예전 같지 않게 정확한 위치를 아무 때나 알아낼 수 있는 항법 장비인 GPS가 있어 별 걱정 없이 수로 입구를 향해 진입을 시작했다.
레이더에 나타나는 물표를 보니 수로의 한가운데 들어설 무렵이면 남향하여 오는 속력이 19노트짜리 선박과 만나질 것으로 예상되어 그 배를 VHF 전화로 불러본다.
응답하고 나온 그 배에게 서로 좌현 대 좌현으로 통과하자고 제의하니 그들은 자신들의 오른쪽으로 지나야 할 산호초의 위험이 꽤나 싫었던 모양인지 우현 대 우현으로 지나가자고 역으로 제안하고 나온다.
우리 역시 그쪽으로 접근하여 통과하기보다는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는 섬과 등대를 오른쪽으로 보며 지나고 싶기도 했지만, 국제 충돌 예방법의 이런 곳에서의 일반적인 통항법이 좌현대 좌현 이므로 그리 통과하도록 고집하여 결국 우리의 뜻대로 관철하여 수로의 한가운데서 서로의 왼쪽을 보면서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우리가 법대로 하는 방법을 굳이 우기어 진행한 일이었지만 결과에서도 그 배를 지나친 후 연달아 만나게 된 그 후의 타선들과도 계속 좌현대 좌현을 이어갈 수 있어서 아주 좋은 형편을 이루게 된 셈이었다.
0849시 CONTAINERSHIP 'MAERSK TACOMA' 선적항은 파나마이나 선주는 덴마크인 배로서 구명정을 보니 우리 배와 마찬가지로 OPEN TYPE이니 나이가 제법 되는 구형의 배다.
이어서 계속 배들이 마치 우리 배더러 인사라도 받으라는 듯이 줄을 서서 내려오는데 그 모든 배와 좌현 대 좌현으로 통과를 하도록 조선이 이어진 것이다.
0913시 일본의 가와사키 기선의 흰색 'K'자 마크가 붉은색 바탕이 칠해진 굴뚝에 뚜렷한 배 ‘FORESTAL GAIA'가 지나가는데 역시 파나마 국적을 갖고 있는 FPC(FOREST-PRODUCT CARRIER) 선이다. 우리들이 보통’WOODEN CHIP‘선이라고 말하는 종이의 원료가 되는 펄프용 목편을 운반하는 선박이다.
0932시 이번에는 좀 작은 배인데 스피드가 14노트 정도로 자세히 살피니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FEEDER선으로 보인다. ‘XIANG HONG(向鴻)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CHINA SHIPPING LINE이라는 회사 설명을 선체 양현에 그려 넣은 배였다.
0935 바로 그 뒤를 이어서 우리 배와 같이 오렌지색 선체를 가진 7 HATCH BULKER가 나타난다. 좌현 선수의 선명에 페인트를 칠 하다 그대로 놔두어서 이름 확인이 어려워 서로 지나친 다음 선미의 명패를 살펴보니 ABIDINTA PAK이라 쓰여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지가 않고 그 밑에 쓰여있는 선적항이 ISTANBUL인 것은 틀림없으니 터키의 배다.
0947시 드디어 마지막 배인 ‘OINOUSSIAN LEADER’라는 역시 7 HATCH를 가진 PANAMAX BULKER가 발라스트 물갈이를 하여 양측 선외로 물을 쏟아내며 지나치고 있다. 이곳(솔로몬 해)에서의 발라스트 교환은 사실은 적법한 상황이 아닌 것으로 우리들은 여기고 있는데 그들은 태연히 그런 일을 행하고 있다.
배 이름은 알았지만 선적항을 알아보려고 선미를 열심히 쌍안경으로 훑어보는데 마침 그 배 POOP DECK로 나타난 한 선원이 갖고 나온 쓰레기 통을 비워준다. 허옇게 날려진 휴지가 그 배가 남긴 항적 위에 추한 흔적을 더해주고 있다.
그런 행동이 하지 말아야 하는 부끄러운 일이란 걸 인식 못하는 그들에게 혀를 끌끌 차는 일 밖에 못하는 형편이 짜증스럽다. 순간 제대로 현장을 확인시킬 수 있는 중거라도 확보하여 신고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선미에 쓰인 글자들을 다시금 살펴본다. 선명을 쓴 글자는 희랍어 같았는데, 선적지의 알파벳은 REIPAITE라고 읽어 볼 수 있었다. 서로 빠르게 지나치는 환경이다. 점점 멀어지는 형편에서 더 이상 살펴볼 정보를 주지 않아 브리지에 구비하고 있는 책자인 PORT INFORMATION에서 항구 이름 Index를 찾아보았다. 그런 항구의 이름이 없다. 다시 IPU 선명록을 뒤져서 겨우 선적국이 그리스인 것은 알아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추적하고픈 마음도 줄어들며, 그렇구나 그 나라의 선원들이니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며 더 이상 추적하는 것도 시들해져서 그 정도에서 마무리 짓기로 하며 책자를 덮어 버렸다.
지금껏 이곳을 지나다니면서 이렇게 줄줄이 이어지는 선박 행렬을 만나면서 약 한 시간에 걸쳐 마치 관함식 사열을 받는 기분으로 조선(操船)을 하며 그들 배와 지나친 것은 유별난 경험이었다.
좁은 수로를 안전하게 통항한 후의 한결 한가해진 후의 브리지에서 본선의 지휘권을 당직사관인 3 항사에게 다시 되돌려주며 기분 좋게 브리지를 떠나 방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