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와 새옹지마
가느다란 보슬비가 연무 인양 내리고 있다.
몇 시간 전까지도 세차게 뿌려지는 빗줄기로 세상의 모든 것을 씻어내려는 하늘의 의지를 보여주는가 싶었었는데, 어느새 그 빗줄기가 많이 약해지고 가늘어지더니 이제는 보슬비로 바뀌어진 것이다.
시정(視程) 역시도 안개에 가리듯 좀은 짧아진 상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평선이 아주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뿌연 수평선을 배경으로 배 한 척이 우리를 앞서서 달리고 있는 게 보인다. 척하니 모양새를 보니 낯이 익은 배인 것 같아 당직사관에게 물으니,
-H 로버츠 뱅크 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아하! 바로 그 배로구나!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하는 느낌과 동시에 감이 잡히며 떠오르는 이름이다.
한전의 발전용 석탄을 수송하는데 투입된 H해운의 배로서, 한 때 같은 일을 하던 신조선인 O마스터호에 책임 선장으로 승선하던 때에 이 바다 위에서 만날 때마다 내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배였다.
하기야 나는 즐거운 추억 속에다 묻어 두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그 배에서도 나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대할 것이라고 믿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떠 올리지 않을까? 싶은 좀은~, 그런 배이다.
승선 생활 중 당직을 열심히 준수하며 항해 중일 때, 선수 쪽 수평선에 은근히 나타난 후,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이는 배를 만난다면, 우리와 반대로 지나가는 배이던가 아니면 우리한테 추월 당하는 배라는 뜻인데, H 로버츠 뱅크 호는 바로 그런 후자의 상황을 자주 만들어주어 자세히 살펴보게 해주던 그런 배중의 한 척이었다.
지난 세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단골손님 마냥 O마스터 호에게 추월 당해 주어 나에게 추월선의 즐거움(?)을 선물해주어 으스대는 마음을 가지게 하며, 반가움조차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때 내가 그 배와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보였을 태도나 마음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입장 되어, 뿌옇게 변해가는 수평선에 걸쳐져 가는 그 배를 배웅하듯 보고 서 있다.
그렇다고 그 배가 지금 우리 배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성능을 가진 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쨌든지 우리 배를 따라잡아 점점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그 배를 쳐다보기만 할 뿐 다른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입장이 약간은 무색 해질 뿐이다.
예전 내가 보았던 광경을 역모션으로 보여주려는 듯,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낮아지고 작아지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윽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그 배를 배웅하며,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켜준다. 졌구나! 씁쓰레한 입맛마저 다셔본다.
결국 <人間之事 塞翁之馬>라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삼천포로 간다는 그 배나, 광양으로 가야 하는 우리 배, 모두가 비슷한 곳 이웃에 위치해 있는 항구로 간다는 말만 이 바다에 남기며 헤어진 것이다.
한때는 만났다 하면 늘 따라잡으며 은근히 우리 배의 성능 좋음을 자랑삼던 마음이었던 것을 이제 그 반대로 우리 배가 추월 당하는 환경이란 아픔(?)으로 되돌려 받으며, 사라져 간 상대 선을 그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배웅해주고 있다.
그래도 너나없이 무사하고 안전한 항해를 완성하도록 빌어보는 아량을, 그윽한 넓은 마음을, 수평선 너머로 딸려 보내주어야 하겠지.
봉-보이지! H로버츠 뱅크호여! 겸허해지자고 마음을 다지며, 가만히 인간지사 새옹지마를 읊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