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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A급 태풍 0010호 BILIS

멀리서 기록해 본 태풍의 모습

by 전희태


JJS_5613.JPG 태풍 빌리스가 지나간 대만 가오슝항

태풍 빌리스는 최소한 하루 정도는 지나서야 떨어질 줄 알았던 기압을, 어제 낮부터 계속 내려주어 940, 935... 하더니 오늘 새벽에는 중심 부근의 풍속이 100노트, 중심기압 920 hpa을 가진 초 A급 태풍으로 자라나 있다. 아직도 더 크게 될 거라며 내일이면 105노트에 달할 것이라는 예보까지 나오더니, 오후 3시의 위치에서는 915 hpa로 중심 부근의 풍속이 110노트로 증속 되는 빠른 변모를 보이고 있다.


풍속계 표시의 상부 한계를 넘어선 속력인 데다가, 기압계의 하부 한계마저 지나쳐 버린 숫자의 기압을 가진 태풍이 되었으니, 만약 그 안에 들어섰던 배가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다 해도, 그 두 가지의 계기만큼은 자신의 표시 능력 범위를 훨씬 벗어난 셈이니 고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다.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큰 위력의 태풍으로 남겨질 BILIS를 그려 넣은 기상도의 형편을 보면 눈에 확 들어오게 여러 가지 크기의 원들이 크기대로 그려져 있고 가운데는 완전히 새까만 동그라미가 박혀 있는 모양이다.

그나마 우리한테 다행이었던 것은, 그 자리에 머무르며 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속력이 10노트에서 좀 더 늘었다 줄었다를 하면서도 꾸준히 서북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움직여 가는 방향의 중심부에 대만의 중앙부가 들어있던 모양에서 약간은 대만 남쪽을 향한 기울어진 그림을 그리며 변하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 배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670 마일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가오슝이 태풍 중심부가 통과할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거리를 재보고 있는 현재 위치는 사흘 전에 태풍 BILIS가 머무르며 지나쳤던 곳으로 태풍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서 북상하고 있는 주변 풍경도 그때와는 달리 전형적인 태풍 일과(一過) 후(後)의 모습으로 바람도 별로 없고 날씨도 쨍하니 맑아 있다. 단지 커다란 너울이 한 번씩 왼쪽에서 다가와서는 16만 톤의 짐을 빵빵하게 싣고 늠름하게 물에 잠겨있는 우리 배의 몸뚱어리를 너무나 쉽게 요람 흔들어 주듯 움직여주며 오른쪽으로 달려가고 있어 이곳에 태풍이 지나갔음을 간접적으로 위세(威勢) 해 보이고 있을 뿐이다.


저녁 7시 15분. 태풍의 중심권이 대만에서 8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계속 접근 중인데 위성뉴스에서는 이미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실종되었다는, 접근만으로도 벌써 사고가 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와는 역시 관계없는 남지나해의 해남도 부근에서 발생한 또 다른 열대성 폭풍이 작은 태풍으로 이름을 받았는데 0011호 ‘KAEMI’라고 나왔다. 한글 이름인 ‘개미’로서 열한 번째의 태풍이란 뜻이다.


2000년도에 열 번째로 생겨난 태풍으로 우리나라 쪽으로 오지 않아서 그 위세나 크기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많지 않지만 중심의 기압이 915 hpa, 중심 부근의 풍속은 110 knots, 호사가가 더욱 숫자 놀음을 원한다면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의 수십, 수백 배가 되는 위력을 가진>이라는 말도 첨가되었던, 하여간 무시무시한 숫자로 무장한 태풍 0010호 BILIS호가 드디어 오늘 새벽 0시 정도에 대만에 상륙했다.


모두가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 쉬어야 할 시간에 달려든 태풍이다. 이미 며칠 전부터 전 방송 매체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태풍 내습 경보로 준비는 하고 있었겠지만, 그 어둠 속에서 대만인들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하룻밤을 지냈을 것이다.

세 시간여 만에 대만의 중남부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여 주파한 태풍은 대만 해협에 들어서서도 아직까지 945 hpa로 어지간한 태풍과 같은 크기를 유지하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단지 움직이는 속력이 18노트로 빨라지어 사람들이 드디어 왔구나! 하며 공포에 몸 둘 바를 몰라 안달하는 사이에, 슬쩍 치고 빠져나가는데 능숙한 아웃복서 마냥, 대만 산하를 순식간에 할켜주며 바다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곳은 대만 해협의 팽호 열도가 자리 잡은 곳이고 더 서쪽으로 가면 중국 대륙이다.


항로 추천 사인 KS WEATHER가 오후에 들어서면서 전문을 보내왔다. 도착 때까지 더 이상의 기상이나 항로 추천 정보는 없다며 비상연락망만 가동하니 이틀에 한 번씩 위치보고만 해달라고 하면서 이번 항차 항로 추천 끝을 선언해 온 것이다. 대만을 가로질러서 중국을 향해 간 것으로 이제 본선은 더 이상 그 태풍으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이렇게 편한 자리에서 중계방송하듯 느긋한 마음으로 그 태풍을 가지고 숫자놀음도 해가며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지만, 실은 녀석이 생겨난 초기 며칠은 우리가 가는 길목으로 들이닥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파묻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제 녀석이 우리와는 정말로 관계없는 상황으로 변화된 현실로 찾아왔으니, 그 반동의 관심을 이렇게 표현하며 무사함을 즐기며 기록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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