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 때 받은 이름 그대로 쓰다 보니.
태풍 빌리스가 남긴 여파가 달려들어서인지, 잘 달리고 있는데도 선내 통로를 걸을 때 한 번씩 기웃둥거리는 몸짓을 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때면 나도 모르게 습관이 돼 버린, 벽에 부착된 스톰 레일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포즈의 팔을 벌린 모습으로, 실제로 잡아도 가며, 통로를 지나 브리지 계단을 오르게 된다.
아직은 일항사가 항해 당직을 서고 있는 아침 7시쯤, 그런 시간에 브리지에 도착하였다. 마침 아침 과업 정렬 전에 일항사와 사전 업무 협의를 하려고 브리지에 올라 와 있던 갑판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일항사와 함께 인사를 건네준 후,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바쁜 아침 시간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페인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던 듯, 침전물이 많이 생기는 질이 떨어지는 제품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럼 열심히 잘 저어서 사용해야겠구먼!
나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프레이 방법으로 칠할 수가 없어서요.
갑판장이 말을 받아 주었다.
빨리 일을 하려고 할 때 노즐이 자주 막히게 되어 쓰기가 불편하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와는 동형의 자매선이고, 비슷한 시기에 신조된 그래서 더욱 선의의 경쟁 선으로 치부하고 있는 오션 팍호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기에,
-오션 팍호도 우리와 같은 페인트를 쓰고 있나요? 물어본다. 딱히 대답을 꼭 들어 보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항상 경쟁 선으로 비교해보든 습성이 나타나 그대로 튀어나온 말이다.
-H 씨 말로는 매스틱 페인트를 쓴다던 데요.
그 배에서 내려 연가를 쉰 후 우리 배로 승선 한, 갑판수 H 씨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며 일항사가 말을 거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열심히 칩핑과 페인팅을 해도 금세 녹이 올라오는 페인트를 쓰는 꼴이라 일한 공도 안 나는데, 우리와 경쟁 선인 오션팍호는 좋은 페인트를 쓰니 정비하는데 많이 유리하잖아? 갑자기 우리가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유치한 생각이 든다.
-우리 배는 의붓자식인가? 왜 차별대우를 하지?
농담같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한데 그렇게 말하고 보니 <말이 씨가 된다>는 경구도 불현듯 떠올리며,
-대우 스피리트 호! 라~.
우리 배의 이름을 다시 한번 입안으로 읊조려 본다.
-참! 이름만 보면 의붓자식 이 맞기는 맞는군~ 허허허.
그리고는 웃음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우리 배는, 회사가 돈을 내어 만들어 낸 배가 아니고, 다른 회사가 몇 년 전 신조한 후, 그 회사가 우리 회사로 합쳐지면서 함께 하게 된, 어찌 보면 양자 같은 입장으로 들어온 배다.
-그래도 그렇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곧 데려온 자식인데, 그렇게 차별대우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진짜로 무슨 차별이라도 받고 있는 것 같이 착각이라도 든 것일까? 누군가 한 마디 거드는 데 말이 이렇다.
얼마 전부터 회사는 페인트의 공급을 페인트 회사별로 선단/선박과 짝을 짓게 하는 수급방법으로 그룹 지은 페인트 사용으로 묶어 주고 있다.
페인트의 질은 높이게 하고 가격은 낮출 수 있게 페인트 회사 간에 경쟁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회사의 새로운 방침인데, 그 와중에 우리 배에 배당된 페인트가 그동안 우리가 쓰던 제품과는 다른 것이라 약간의 문제가 있기도 했다.
기왕에 나온 말들, 한바탕 씨 부리고 떠들어서 스트레스라도 풀면 되는 것이고, 이제는 우리가 열심히 정비를 하고 있다는 표시도 내고, 또 정비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다 싶어,
-어이 일항사! 어쨌거나 이번에 감독이 방선하면 애교로라도 우리가 의붓자식인가?
-왜 차별 대우를 하냐고 항의는 한번 해야겠어, 허허허.
우스개 소리로 마무리 지어주었다.
사실 우리 배는 회사의 돌림자 이름을 쓰지 않은 배다. 85년도에 여러 회사가 우리 회사인 범양상선으로 합쳐질 때, 자신의 고유한 선명을 그대로 갖고 영입되어 온 배다.
신조할 당시, 그 회사에 알 맞는 선명으로 명명되었든 이름을, 회사가 합병되었을 때 구태여 선명까지 바꿀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경영진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개명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 경우 통상적으로는 다른 선명으로 개명하는 게 보편적인 이 바닥의 관례 이건만, 그리 안 하고 이름까지도 그대로 인수해 주었던 것이다. 때문에 외국 항에 기항 시 어쩌다 선명의 뜻을 물어 오면서 그 연유까지 묻는 대리 점원이나 도선사를 이따금 만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설명에 궁한 적도 있던 터였다.
며칠이 지난 후, 침전물에 대한 사항을 페인트 품질에 관한 현장의 불만사항으로 본사에 보고 하였는데, 회사 역시 생산회사로 통보, 그 제품의 품질을 재검사한 결과, 본선에 공급한 물량 전부가 불량품으로 자체 판명되어서 전량 완제품으로 바꿔 받게 되었다. 이로서 회사가 우리 배를 의붓자식 마냥 취급한 게 아니라는 확실한 판정을 받아 쥔 셈이 되었다.